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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개소리가 너무 많다. 말 되는 소리 좀 하자. 활은 하나인데 화살은 사방으로 날아간다. 원인은 하나인데 경과는 둘이고 결과는 여럿이다. 갈수록 태산이다.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자궁이 있는 법이다. 만유가 공유하는 하나의 의사결정 플랫폼을 찾아야 한다면 그것이 구조론이다.
백과사전식 열거주의라면 좋지 않다. 난삽함을 피하고 하나의 근본, 하나의 엔진, 하나의 핵심을 짚어야 한다. 사건 전체를 한 줄에 꿰어 하나의 통짜덩어리로 설명해야 한다. 실제로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지점을 조사해야 한다. 뒷북치지 말고 에너지의 작용측을 해명해야 한다. 계의 통제가능성 위주로 설명해야 한다. 여러 피해자를 탓하지 말고 한 명의 범인을 취조해야 한다.
본말전도라 했다. 본이 뒤집어지니 말이 어지러워졌다. 하나의 근본을 방치하고 여러 말단에 매달리니 노가다만 풍성해졌다. 인간들이 말을 개판으로 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 전에 언어가 비뚤어져 있다. 언어도 개판이지만 그 전에 관점이 비뚤어져 있다. 관점도 개판이지만 그 전에 게임이 비뚤어져 있다. 그렇다. 게임이 문제다. 게임에 이겨서 하나의 핸들을 잡으면 되는데 게임에 져서 핸들을 뺏기므로 뒷설거지 하느라 일이 많아진 것이다.
원인측 -> 결과측 비용이 적다 -> 비용이 많다. 게임에 이긴다 -> 게임에 진다.
엔트로피란 간단히 불을 지르는 비용이 불을 끄는 비용보다 적다는 거다. 먼저 와서 불을 지르는 사람이 1의 에너지를 사용한다면 뒤에 와서 불을 끄는 사람은 100의 에너지를 소비한다. 인생이 피곤한 이유는 당신이 게임에 져서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는 자의 포지션에 섰기 때문이다. 사건의 원인측이 아니라 결과측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상호작용으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인생은 환경과의 게임이다. 상호작용의 랠리가 우리가 잡아야 할 핸들이다. 게임에 이긴 자는 물을 엎지르고 진 자는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는다. 게임에 이겨서 내가 핸들을 잡으면 쉽다. 뒤에 와서 흩어진 퍼즐 맞추느라 골머리 싸매지 말고 먼저 와서 문제를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은 도구의 사용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도구는 언어다. 언어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언어가 개판이다. 구조론은 언어의 완성이다. 다들 말을 개판으로 한다. 말을 똑바로 하려고 노력하면 구조론은 그 안에 있다. 사물을 하나씩 주워섬기는 플러스 언어에서 사건을 확실하게 매조지하는 마이너스 언어로 갈아타야 한다. 복잡한 것을 단순화 시키는 언어라야 한다. 여러 결과는 하나 원인으로 바꾸고, 여러 부분은 하나의 전체로 바꾸고, 여러 단절은 하나의 연결로 바꾸고, 여러 강체는 하나 유체로 바꾸고, 여러 사물은 하나의 사건으로 바꾸는 언어라야 한다.
존재는 사물 아니면 사건이다. 사물이 한 자리에 모이면 사건이 일어난다. 개와 원숭이가 만나면 싸움이 일어난다. 원수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면 격투가 벌어진다. 틀렸다. 남녀가 한 방에 머무르면 무슨 일이 생긴다. 존재가 모여서 사건을 일으킨다. 아니다. 실제로는 우주 안에 사건이 존재할 뿐이다. 사물은 존재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끼리의 약속이다. 인간의 언어적 편의다.
공기 입자는 사물이다. 바람이 부는 것은 사건이다. 그런데 공기 입자도 소립자 단위로 쪼개면 결국 사건이다. 존재는 혼자 성립할 수 없고 반드시 짝을 지어야 한다. 어떤 둘이 토대를 공유하고 나란히 움직이면 사물처럼 보인다. 팽이가 돌고 있는 것은 사건이다. 그런데 외부의 관측자에게는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물은 고정되어 있고 사건은 움직인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결국 움직이는 사건이며 그 중에서 나란히 가므로 해석을 생략해도 되는 것이 사물이다. 움직이는 사건은 자연의 실재 모습이고 고정된 사물은 말하자면 단축키 같은 것이다.
바둑이라면 바둑알과 대국이 있다. 바둑알은 보인다. 대국은 보이지 않는다. 대국은 바둑알의 자리바꿈을 보고 해석한다. 컴퓨터라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다. 하드웨어는 보인다. 소프트웨어는 보이지 않는다. 생물이라면 세포와 생명이다. 세포는 보인다. 생명은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사물과 사건으로 이루어진다. 사물은 그냥 보이고 사건은 해석하여 퍼즐을 맞춰야 보인다.
바람 - 분다 물 - 흐른다 나무 - 자란다 과일 - 익는다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고, 나무가 자라고, 과일이 익어가는 것은 인간이 해석하여 퍼즐을 맞춘 것이다. 명사와 동사를 연결하여 짝을 짓는 것이 해석이다. 풋사과와 익은 사과는 다른 사과인데 둘을 연결하여 같은 사과로 치는 것은 인간의 해석이다. 구조론은 사건을 해석하는 도구다. 퍼즐을 쉽게 맞춘다.
일찌기 사건에 주목한 사람은 없었다. 인류의 문명사 1만년 동안 인류는 변화하는 사건이 아니라 고정된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잘못을 저질러 왔다.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건너가듯이 인류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건너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사물의 세계에서 사건의 세계로 갈아타야 한다.
공간과 시간은 자연에 없다. 그런 존재가 없다. 그것은 물질의 변화를 해석하는데 쓰이는 말에 불과하다. 그런데 있는 걸로 친다. 이는 사건을 사물화 한 것이다. 그게 더 쉽기 때문이다. 사건의 해석이 귀찮아서 꼼수를 쓴 것이다. 편의로 왜곡한 것이다. 그런데 도구를 쓰면 어떨까? 도구가 대신 해석해주면 어떨까? 인간은 핸들만 쥐고 있으면 된다. 어질러진 퍼즐 조각은 구조론이 맞추어준다. 그렇다면 꼼수를 버리고 정공법으로 승부할 수 있다. 사물의 관점을 버리고 사건의 해석으로 갈아타야 한다.
구조론은 다섯 단계로 변화를 설명한다. 변화가 일어나기 전과 후가 둘이다. 각각 원인과 결과가 된다. 중간의 변화과정에 변화의 수단과 방향과 내용으로 셋이 추가되어 다섯이 된다.
원인 - 1 수단 - 2 방향 - + 내용 - = 결과 - 3
'1+2=3'이다. 분해하면 A, B, C 셋에 +와 =까지 다섯이다. 왜 숫자는 자리가 셋이고 기호를 포함하여 다섯이 되는가? 거리를 확인할 때는 삼각측량을 쓴다. 거기에 관측자와 관측대상을 더하면 다섯이다. GPS는 위성 세 개의 신호로 위치를 파악한다. 흔들리는 카메라를 안정시킬 때는 3축 짐벌을 쓴다. 공간은 선, 면, 입체의 3차원이다. 좌표는 X축, Y축, Z축을 쓴다. 실제로는 좌표의 원점과 점 P까지 다섯이 세트로 간다. 어떤 A와 B를 연결하려면 추가로 셋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출발점, 수단, 방향, 내용, 도착점. 내가(출발점) 차를 타고(수단) 떠나서(방향) 간다(내용) 부산에(도착점)
투수가 A라는 공을 던졌을 때, 타자가 B라는 방망이를 휘둘러서, C에 공이 떨어졌는데 +는 방망이에 맞았다는 말이고, =는 공이 날아갔다는 말이다. 개를 말뚝에 묶으려 해도 개와 말뚝 사이에 목걸이, 줄, 매듭이 필요하다. 변화를 헤아리려면 관측자와 관측대상을 제외하고 중간에 연결고리가 되는 셋이 필요하다. 주체와 객체 사이에 수단과 방향과 내용이 있다. 궁수와 과녁 사이에 활과 화살과 진행방향까지 셋이 필요하다.
핵심은 변화다. 변화는 일단 둘이다. 변하기 전과 변한 후다. 거기에 변화를 격발하는 방아쇠가 있으므로 셋이다. 누가 주체이고 객체인지를 적시해야 하므로 넷이다. 변화의 내용까지 다섯이다. 다섯을 모두 진술하지 않으면 내가 밥을 먹었는지 밥이 나를 먹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말은 조사가 해결하지만 말이다.
'내가 밥을 먹었다.'고 해도 내(원인)+가, 을(방향)+밥(수단)+먹(내용)+었다(결과)로 구분된다. 조사를 생략하면 밥이 나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주의해야 한다. 주어를 생략하거나 어순이 조사를 대행하므로 대충 말해도 알아듣지만 말이다.
어떤 둘의 관계를 판단할 때는 항상 3이 쓰인다. 우리는 여기서 핵심을 놓친다. 왜 둘은 빼지? 돼지셈을 한다. 돼지 열마리가 소풍을 갔다. 소풍을 마치고 돌아올 때가 되어 엄마돼지가 세어보니 9마리다. 한 마리는 어디로 갔자? 자신을 빼고 센다. 과학은 엄밀해야 한다. 수학의 차원은 원래 1, 2, 3차원만 있었다. 0차원과 4차원이 추가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건의 복제 때문이다.
하나의 사건이 ABCDE로 성립하지만 잘 살펴보면 ABC가 CDE를 복제한 것이다. 그러려면 BCD가 필요하다.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A와 E를 매개하는 B, C, D에 앞서 외력의 작용이 있고 그 외력을 ABC가 매개하는 것이다.
개가 말뚝에 매여 있다. 말뚝 - 매듭 - 줄 - 목걸이 - 개로 다섯이 A, B, C, D, E를 이룬다. 그런데 사람이 와서 말뚝에 매고 있다면? 개가 말뚝을 부러뜨리고 도망친다면? 사람이 들어오면 개가 빠진다. 사람과 개목줄의 관계가 된다. 마찬가지로 말뚝이 부러지면 말뚝이 빠지고 개의 도주가 추가된다. 하나가 들어오면 하나가 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ABC를 복제한 것이 CDE이며 그 근거가 되는 것이 BCD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 둘은 빼놓고 중간의 3만 본다. 짐벌은 3축만 쓰고, 좌표는 XYZ만 쓰고 삼각측량도 삼각만 쓴다. 그런데 인간의 눈과 카메라도 축이라는 사실이 치명적이다. 합쳐서 5축이 된다. 좌표도 원점과 P가 있다. 삼각측량을 해도 측량기사와 폴대가 있다. 항상 둘이 더 있다. 그래야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고정된 것을 관측하는데 익숙해서 중간의 셋만 체크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표적이 움직이면? 움직이는 사수가 움직이는 표적을 쏜다면? 피라밋의 높이를 재는 데는 삼각측량의 셋으로 충분하다. 피라밋이 어디로 도망가지 않기 때문이다. 날아가는 새를 추적한다면?
대포를 쏴도 세번째에 명중탄을 쏜다. 첫 번째 탄으로 자를 만든다. 두 번째 탄으로 변화율을 얻는다. 세 번째 탄이 명중탄이 된다. 첫번째 탄은 대충 어림짐작으로 1000미터를 쏜다. 두번째 탄은 장약을 백그램 증가시켜 1500미터를 쏜다. 장약 백그램에 포탄이 500미터 더 날아갔다면 장약을 얼마나 추가해야 타겟을 명중시킬 수 있을지 계산이 나와주는 것이다. 포반장은 알고 있다.
인간이 저지르는 대부분의 오판은 에너지의 방향을 헷갈리는 것이다. 우리는 임대와 임차를 헷갈리고, 빌다와 빌리다를 헷갈리고, 주인과 손님을 헷갈리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별하지 못한다. '쌀 팔아오너라.'고 하면 쌀집에 가서 쌀을 사오라는 말이다. 옛날 사람들은 사다와 팔다를 반대로 말한다. 한자어 매매賣買도 발음이 비슷해서 헷갈리기 좋다.
헤겔의 변증법이니 마르크스의 양질전화니 하는 것이 대표적인 순환논증의 오류, 후건긍정의 오류다. 량이 질로 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엔트로피의 법칙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헷갈리는 이유는 사건의 닫힌계를 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전에 사건이라는 개념조차 없기 때문이다. 사건은 에너지 공급자 위주로 해석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여러 사건을 뒤섞어 놓으면 양질전화처럼 보인다. 사건의 동력원과 파워트레인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인간은 수직적 사고에 약하다. 대개 수평적 사고에 매몰되어 있다. 닭장에 갇힌 두 마리 닭이 서로 쪼아댄다. A가 B의 원인이고 B가 A의 원인이다. 틀렸다. 두 마리 닭이 서로 쪼아대는 이유는 공간이 비좁아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원인은 항상 둘이 공유하는 제 3자다. 수평에서 둘이 교착될 때 원인은 수직구조다. 2층에서 담배꽁초를 던졌는데 1층에 사는 두 사람이 서로 상대를 의심하며 싸우는 격이다. 여당은 야당탓 하고 야당은 여당탓한다. 대개 산업의 생산력이 원인이다. 남한은 북한탓, 북한은 남한탓 한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충돌이라는 더 큰 단위에 원인이 있다.
바닷물이 증발하여 비구름이 되고 빗물이 다시 강으로 흘러간다. 물의 순환이다. 바다가 비의 원인이고 비가 바다의 원인이다? 틀렸다. 물을 순환시키는 주체는 태양이다. 태양이 바닷물을 증발시키고 중력이 빗방울을 낙하시킨다. 강물과 바다는 수평의 대칭이다. 원인은 수직의 태양과 중력이다. 대개 이런 식이다. 수평의 교착은 수직에서 타개해야 한다. 전후, 좌우처럼 수평적으로 대칭되는 것은 서로의 원인이 될 수 없다. 50 대 50으로 교착되기 마련이므로 사건을 격발할 수 없다. 항상 양자를 통일하는 제 3의 존재가 있다. 사건을 격발하는 상부구조는 수직구조에 있다.
A가 B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B가 A의 원인으로 보이는 경우는 양자를 통일하는 진짜 원인 C가 배후에 숨어 있다. 약자들이 지역과 성별과 피부색으로 나누어 서로 싸우게 만들어놓고 이득을 취하는 강자의 노림수가 있다. 왼발이 오른발을 내딛는 원인이고 오른발이 왼발을 내딛는 원인인 것처럼 보인다. 왼발과 오른발은 수평의 교착이다. 사실은 수직의 몸통이 원인이다.
구조론은 일원론이다. 수직 1로 수평 2를 통제하는 사건의 일방향성이 중요하다. 엔트로피의 법칙은 진작에 알려졌다. 엔트로피의 법칙이 열역학에 한정되지 않는 자연의 보편적 원리라는 사실도 알려져 있다. 그런데 모른다. 이걸 어디에 써먹어야 하는지를 모른다. 모든 사건에는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있다. 메커니즘은 톱니가 맞물려서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둘인데 하나처럼 행세한다. 사건은 시간을 타고 화살처럼 한 방향으로 간다. 우리가 사건이 아니라 사물에 주목하므로 헷갈리게 된다. 맞물려 돌아가는 둘 중에서 머리와 꼬리를 분별하지 못한다.
사물은 평등하지만 사건은 평등하지 않다. 사건은 언제나 한 사람이 키를 쥔다. 승객은 평등하지만 운전기사는 평등하지 않다. 언제나 조직을 장악하고 핸들을 쥔 사람이 있다. 총은 한 개의 방아쇠가 있다. 자연은 작용과 반작용이 하나의 에너지 효율성에 지배되고 시장은 수요와 공급이 하나의 이윤에 지배된다. 자동차는 하나의 엑셀레이터 페달로 전진한다. 전등의 스위치는 하나다. 의사결정은 언제나 한 지점에서 비대칭적으로 일어난다. 그물이 넓어도 당기는 벼릿줄은 하나다. 대충 얼버무리지 말고 핵심이 되는 하나에 도달할 때까지 사유를 밀어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언어는 연결이다. 맥락이 연결되지 않고 중간에 끊어지거나 얼버무리거나 갑툭튀 하면 그게 개소리다. 연결은 공유다. 사슬은 마디를 공유하다. 공유를 끝까지 추적하여 정상까지 연결해야 한다. 정상은 사건 전체를 공유한다. 다양한 헛소리를 주워섬기다 보면 그 중에 혹시 하나 쯤은 진실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전부 개소리다. 판을 완전히 갈아엎어야 한다. 다섯가지 유형의 개소리가 있다.
첫째는 괴력난신. 애초에 개소리 할 요량으로 지어낸 뻔뻔한 개소리다. 사차원, 초능력, UFO, 귀신, 무한동력, 각종 음모론 따위다. 소인배가 대중의 이목을 끌려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질러보는 것이다. 이들은 뭔가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암시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근거는 없고 그냥 먹히니까 하는 말이다.
둘째는 희망사항. 그런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그게 실제로 있다고 말해버리는 것이다. 원자론, 결정론, 이데아론, 해탈, 유토피아론, 혁명이론, 종교의 신 개념이다. 항해자에게는 길을 안내하는 등대가 필요하지만 그게 바로 이거다 하고 타겟을 찍으면 안 된다. 아닌 것을 배제하면 남는 것이 정답이다.
셋째는 관념타령. 듣기 좋은 말로 사람을 꼬시는 말이다. 자유, 평등, 정의, 평화, 사랑, 행복, 윤리, 도덕 따위다. 뭐든 좋은 말은 다 갖다 붙이면 된다. 이들은 결과를 소급하여 원인으로 바꿔치기 하는 본말전도 수법을 쓴다. 일이 잘 풀리면 그런 좋은 결과가 올 수도 있지만 그게 우리가 잡을 핸들은 아니다.
넷째는 낚시신공. 작은 것을 투자해서 큰 것을 먹는다는 궤변이다. 처세술, 노자사상, 정신력, 실용주의, 손자병법, 노력타령 따위다. 원칙보다 변칙, 정론보다 궤변, 큰길보다 뒷길, 실력보다 협잡으로 이긴다는데 다단계 상술과 같이 일시적으로 먹히지만 지속가능하지 않다. 떡밥만 열심히 던지다가 거덜난다.
다섯째는 선입견. 말하기 편한대로 말해버리는 것이다. 민족성, 동기, 야망, 목적, 의도, 욕망, 쾌락 따위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얕은 지식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네 생각이 맞다'고 긍정하며 살살 넘어오게 만든다. 사람을 어린애 취급하며 갖고 놀려는 수작이다. 편견과 혐오, 차별주의, 고정관념을 강화한다.
낚이는 사람이 있으니까 낚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거짓말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구조론은 수학이다. 수학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공식을 제공할 뿐 답을 찍어주지 않는다. 꾸준하게 개소리를 쳐내다보면 희미하게 방향이 보일 것이다. 중도에 포기하고 주저앉아 구석에서 작은 점방을 개설하여 본전을 회수하려는 소인배의 작은 욕심을 버려야 한다. 큰 뜻을 품고 큰 그림을 그리고 끝까지 가면 진실이 이긴다.
구조론은 사건을 해석하는 도구다. 사물이냐 사건이냐다. 사물은 그냥 관찰하면 되는데, 사건은 여럿이 모여서 계를 이루고 이차적인 변화를 일으키므로 퍼즐 맞추기가 만만치 않다. 사건은 해석이 필요하므로 특별한 도구를 써야 한다. 수학문제와 같다. 사건은 복잡하게 얽혀서 돌아가므로 정해진 공식에 대입해서 풀어야 한다.
사물 - 관찰로 알 수 있다. 사건 - 해석으로 알 수 있다.
소금이 짜고 설탕이 단 것은 사물의 성질이다. 사물의 성질은 변하지 않으므로 믿을 수 있다. 그런데 구름이 비가 되어 내리고 과일이 썩는 것은 사건이다. 뭉게구름이 모이면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다. 상자 속의 감귤 중에서 하나가 썩으면 순식간에 죄다 썩는다. 사건은 일정한 조건이 충족될 때 갑자기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 객체의 고유한 성질이 아니라 주변의 환경적 조건이 사건을 격발하므로 헷갈리게 된다.
토끼 한 마리를 상자에 넣어두면 토끼 한 마리가 있는 것이다. 사물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토끼 두 마리를 상자에 넣어두면 어느새 새끼를 쳐서 열 마리로 늘어나 있다. 출산 직전의 임신한 어미 토끼를 모르고 팔았다면 손해가 크다. 사건의 변화는 미묘하므로 우리가 신중하게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물 - 쪼개보면 안다. 사건 - 합쳐봐야 안다.
사물은 잘 살펴보면 된다. 안 되면 속을 쪼개보면 된다. 호두를 까보면 안다. 그런데 사건은 방향이 반대다. 씨앗이 싹이 트는지는 심어봐야 안다. 토끼가 새끼를 낳는지는 합방시켜봐야 안다. 자동차가 탈만한지는 시동을 걸어봐야 안다. 쪼개보는 사물의 관찰과 합쳐보는 사건의 해석은 접근방향이 상반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퍼즐 맞추기를 시도하지만 사건의 복잡성이라는 장벽에 막혀 좌절하게 된다. 사물은 그냥 있지만 사건은 대칭을 이루고 짝을 짓는다. 사건은 원인과 결과, 전체와 부분, 연결과 단절, 머리와 꼬리로 나누어져 대칭을 이루고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며 메커니즘을 작동시킨다. 대칭의 동시성이 문제로 된다. 사건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므로 퍼즐을 맞춰도 둘을 동시에 맞춰야 한다는데 어려움이 있다.
사건은 진행하면서 열린계가 닫힌계로 바뀌고, 강체가 유체로 바뀌면서 객체의 고유한 속성은 의미가 없고 수학적 확률이 지배하게 된다. 처음 있었던 성질은 사라지고 원래 없던 질서가 갑자기 생겨나서 자체의 동력을 갖추고 폭주한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리게 된다. 처음에는 사람이 불씨를 당기지만 나중에는 불이 불을 지른다. 우리는 사건의 폭주에 당황하게 된다.
그런데 복잡한 것은 추려서 역으로 단순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구조의 힘이다. 사건은 대칭에 의해 복잡하게 전개하지만 대칭의 축을 장악하면 오히려 단순해진다. 양떼를 들판에 풀어놓으면 복잡하지만 우리에 가둬놓으면 단순하다. 사건을 격발하는 방아쇠를 장악한다면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다. 핵심을 장악하면 오히려 사건이 더 다루기 쉽다. 사물은 힘으로 제압해야 하지만 사건은 대칭을 걸어서 교착시켜 놓으면 고분고분해진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멋지게 사건을 핸들링 할 수 있다.
사물이 재료라면 사건은 요리다. 요리사는 지지고 볶고 데치고 삶아서 원재료에 없는 새로운 맛을 끌어낸다. 그것은 속성이 아니라 관계다. 그것은 성격이 아니라 궁합이다. 사물을 관찰하는 단순한 방법으로는 복잡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의 퍼즐맞추기를 감당할 수 없고 사건의 해석은 특별한 도구를 써야 한다. 구조론이 그 도구다.
구조론은 수학화 시켜서 보는 방법이다. 들판에 흩어진 양떼를 수학이라는 우리에 가둬버린다. 닫힌계를 걸어 외부 변수를 차단하고 판을 키워서 유체의 성질을 부여하면 객체의 속성은 사라지고 수학적인 관계가 성질을 대신한다. 사건 내부에서 대칭을 이루고 토대를 공유하며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있다. 사건의 메커니즘을 끌고 가는 핸들이 있다. 그 핸들을 잡아야 한다. 비로소 정상에서 전모를 보는 시선을 얻을 수 있다.
구조론은 커다란 그물과 같다. 고래를 잡든 물개를 잡든 상관없다. 한 번 던져진 그물은 당길 수만 있고 풀 수는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게임에 뛰어들면 판이 끝날때까지 대결을 멈출 수 없다. 그물을 던질 때는 넓게 벌려야 하고 벼릿줄을 당길 때는 깔때기를 좁혀야 한다. 우리가 얻어야 하는 기세는 그 넓음과 좁음 사이에 비례로 있다. 일을 크게 벌이고 몫을 작게 챙기면 부가가치로 많은 것이 따라온다. 사건은 기세에 의해 다음 게임으로 연결된다. 당장 성과를 내기보다 기세를 얻어 다음 게임에 초대되는 것이 중요하다.
넓음 - 좁음 = 기세
공간의 그물은 구構, 시간의 벼리는 조造다. 구構의 그물코를 넓게 벌리고 조造의 벼릿줄을 한결같이 당겨서 커다란 깔대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 플러스 알파로 기세가 따라온다. 사물은 쪼개봐야 알 수 있지만 기세는 합쳐봐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접근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물에는 기세가 없고 사건에는 기세가 있다. 강체는 기세가 없고 유체는 기세가 있다. 결과측에는 기세가 없고 원인측에 기세가 있다. 단절에는 기세가 없고 연결에 기세가 있다.
기세는 전체의 힘을 한 지점에 몰아준다. 한 지점만 장악하면 되므로 다루기 쉽다. 물질의 기세가 관성이라면, 시장의 기세가 이윤이고, 집단의 기세는 권력이다. 기세는 사건을 연결하므로 만유의 조절장치가 된다. 연결하거나 끊는 방법으로 조절한다. 자동차의 핸들이 되고, 소총의 방아쇠가 되고, 전등의 스위치가 된다. 개인에게는 매력이 기세, 동료간에는 의리가 기세, 기업간에는 경쟁력이 기세, 국가간에는 생산력이 기세, 문명간에는 진보가 기세다.
자연은 기세를 쓰고 인간은 도구를 쓴다. 자연은 기세로 연결하고 인간은 도구로 연결한다. 도구는 중립이다. 좋은 사람이 쓰면 좋아지고 나쁜 사람이 쓰면 나빠진다. 도구는 서로 간에 합이 맞아야 한다. 합을 맞추려면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이 도구를 쓸 확률이 높다. 절구공이는 방아확과 합이 맞아야 한다. 악기는 연주자와 호흡이 맞아야 한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연장을 만나야 좋은 가구가 만들어진다.
구조론은 세상 전체를 커버할 수 있는 커다란 그물이다. 큰 그물은 혼자 던질 수 없고 함께 던져야 한다. 도구를 사용하며 서로간에 합을 맞추는 것이 의리다. 큰 그물을 함께 당기게 하는 것이 의리다. 의리를 배웠다면 다 배운 것이다. 의리로 기세를 얻고, 기세로 사건을 연결하여 더 큰 그물을 만드는 방법으로 이길 수 있다.
사람들은 서울로 간다느니 제주도로 간다느니 하며 다툰다. 어디로 가든 상관없다. 이념타령, 노선타령, 관념놀음, 프레임 걸기 부질없다. 이왕 갈것이면 차를 타고 가야 한다. 맨땅에 헤딩하지 말고 도구를 써야 한다. 운전석을 차지하고 핸들을 잡아야 한다. 운전하는 재미를 알면 처음에 멱살잡이 다툼 벌였던 행선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은 가던 길을 계속 가게 된다. 좋은 악기를 얻은 연주자, 좋은 차를 얻은 운전자, 좋은 도구를 얻은 목수, 좋은 재료를 얻은 요리사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
구조론
사건 사물 닫힌계 엔트로피
복잡성
test
질 입자 힘 운동 량
시스템 메커니즘 스트럭쳐 액션 코드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
확산 수렴, 마이너스 플러스, 연결 단절 위치에너지 운동에너지
상부구조 하부구조, 유체 강체
방향성
효율성
플러스알파, 권력, 이윤, 관성, 기세
에너지낙차
구조손실 통제가능성 대칭, 밸런스, 코어, 지렛대
존재론 인식론
연역 귀납
원인 경과 결과
역설 이중의역설
모순
상호작용 일방작용, 게임
관측 해석, 주체 객체
차원 계 체 각 선 점
저울 됫박 컴퍼스 자 수
소재 기능 성능 효능 외양
입력 저장 제어 연산 출력
의사결정
의미 가치
전략 전술
일원론
일의성
언어, 담론, 전제 진술
동원, 소집, 사회
의리
선악
진보 보수
주체성 타자성
자아, 소외, 자유의지
영역 세력 서열
정명사상 괴력난신
관점
관념
깨달음
의하여 위하여
대승 소승
합리주의 실용주의, 공사구분
게임에의 초대
세상에 개소리가 너무 많다. 말 되는 소리 좀 하자. 활은 하나인데 화살은 백방으로 날아간다. 원인은 하나인데 경과는 여럿이고 결과는 더 많다. 갈수록 태산이라 억장이 무너진다.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자궁이 있는 법이다. 백과사전식 열거주의라면 좋지 않다. 난삽함을 피해야 한다. 하나의 근본, 하나의 엔진, 하나의 핵심을 짚어야 한다. 사건 전체를 한 줄에 꿰어 하나의 통짜덩어리로 설명해야 한다. 실제로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지점을 중심으로 사유해야 한다. 에너지의 작용측을 해명해야 한다. 계의 통제가능성 위주로 설명해야 한다. 여러 피해자를 탓하지 말고 한 명의 범인을 취조해야 한다.
본말전도라 했다. 뒤집어진 본을 놔두고 어질러진 말에 대응하니 피곤한 일이다. 자잘한 노가다에 앵벌이로 시간 때우지 말고 통 큰 뒤집기 한 판으로 해결봐야 한다. 인간들이 말을 개판으로 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 전에 언어가 비뚤어져 있다. 언어도 개판이지만 그 전에 관점이 비뚤어져 있다. 관점도 개판이지만 그 전에 게임이 비뚤어져 있다. 의심해야 한다. 우리는 행선지도 모르면서 엉뚱한 차에 탑승하지 않았는가? 일이 이 지경이라면 사태는 꼬여도 단단히 꼬인 셈이다. 쾌도난마라 했다. 단 칼에 베어버리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감당할 수 있겠는가?
전부 거짓말이다
언어는 연결이다. 맥락이 연결되지 않고 중간에 끊어지거나 얼버무리거나 갑툭튀 하면 그게 개소리다. 연결은 공유다. 사슬은 마디를 공유하다. 공유를 끝까지 추적하여 정상까지 연결해야 한다. 정상은 사건 전체를 공유한다. 다양한 헛소리를 주워섬기다 보면 그 중에 혹시 하나 쯤은 진실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전부 개소리다. 판을 완전히 갈아엎어야 한다. 다섯가지 유형의 개소리가 있다.
첫째는 괴력난신. 애초에 개소리 할 요량으로 지어낸 뻔뻔한 개소리다. 사차원, 초능력, UFO, 귀신, 무한동력, 각종 음모론 따위다. 소인배가 대중의 이목을 끌려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질러보는 것이다. 이들은 뭔가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암시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근거는 없고 그냥 먹히니까 하는 말이다.
둘째는 희망사항. 그런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그게 실제로 있다고 말해버리는 것이다. 원자론, 결정론, 이데아론, 해탈, 유토피아론, 혁명이론, 종교의 신 개념이다. 항해자에게는 길을 안내하는 등대가 필요하지만 그게 바로 이거다 하고 타겟을 찍으면 안 된다. 아닌 것을 배제하면 남는 것이 정답이다.
셋째는 관념타령. 듣기 좋은 말로 사람을 꼬시는 말이다. 자유, 평등, 정의, 평화, 사랑, 행복, 윤리, 도덕 따위다. 뭐든 좋은 말은 다 갖다 붙이면 된다. 이들은 결과를 소급하여 원인으로 바꿔치기 하는 본말전도 수법을 쓴다. 일이 잘 풀리면 그런 좋은 결과가 올 수도 있지만 그게 우리가 잡을 핸들은 아니다.
넷째는 낚시신공. 작은 것을 투자해서 큰 것을 먹는다는 궤변이다. 처세술, 노자사상, 정신력, 실용주의, 손자병법, 노력타령 따위다. 원칙보다 변칙, 정론보다 궤변, 큰길보다 뒷길, 실력보다 협잡으로 이긴다는데 다단계 상술과 같이 일시적으로 먹히지만 지속가능하지 않다. 떡밥만 열심히 던지다가 거덜난다.
다섯째는 선입견. 말하기 편한대로 말해버리는 것이다. 민족성, 동기, 야망, 목적, 의도, 욕망, 쾌락 따위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얕은 지식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네 생각이 맞다'고 긍정하며 살살 넘어오게 만든다. 사람을 어린애 취급하며 갖고 놀려는 수작이다. 편견과 혐오, 차별주의, 고정관념을 강화한다.
낚이는 사람이 있으니까 낚는 사람이 있다. 거짓말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구조론은 수학이다. 수학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공식을 제공할 뿐 답을 찍어주지 않는다. 꾸준하게 개소리를 쳐내다보면 희미하게 방향이 보일 것이다. 중도에 포기하고 주저앉아 구석에서 작은 점방을 개설하여 본전을 회수하려는 소인배의 작은 욕심을 버려야 한다. 큰 뜻을 품고 큰 그림을 그리고 끝까지 가면 진실이 이긴다.
창조보다 구조
구조론은 커다란 그물이다. 고래를 잡든 물개를 잡든 상관없다. 한 번 던져진 그물은 당길 수만 있고 풀 수는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물을 던질 때는 넓게 벌려야 하고 벼릿줄을 당길 때는 깔대기를 좁혀야 한다. 여러분이 얻어야 하는 기세는 그 넓음과 좁음 사이에 비례로 있다. 일을 크게 벌이고 몫을 작게 챙기면 뒤에 부가가치로 많은 것이 따라온다. 사건은 다음 단계로 연결된다. 당장 성과를 내기보다 다음 게임에 초대되는 것이 중요하다. 공간의 그물은 구構, 시간의 벼리는 조造다. 구의 그물코를 넓게 벌리고 조의 벼릿줄을 한결같이 당겨서 커다란 깔대기를 만들어야 한다. 구조론은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도구다. 좋은 사람이 쓰면 좋아지고 나쁜 사람이 쓰면 나빠진다. 이왕이면 좋은 사람이 구조론을 써야 한다. 혼자 못 쓰고 함께 써야 하는 도구이므로 좋은 사람이 쓸 확률이 높다. 큰 그물은 혼자 던질 수 없고 함께 던져야 한다는게 의리다. 의리를 배웠다면 다 배운 것이다.
사람들은 서울로 간다느니 제주도로 간다느니 하며 다투고 있다. 어디로 가든 상관없다. 이념타령, 노선타령, 관념놀음 부질없다. 이왕 갈것이면 차를 타고 가야 한다. 맨땅에 헤딩하지 말고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이왕 차를 탔으면 운전석에 앉아야 한다. 남탓은 하지 말고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이왕 운전석에 앉았으면 핸들을 쥐어야 한다. 운전하는 재미를 안다면 멱살잡이 다툼 벌였던 행선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당신은 계속 가게 된다
구조론
구조론은 사건을 해석하는 도구다. 인류의 지식획득 방법으로는 사건의 해석과 사물의 관찰이 있다. 형태가 있는 사물은 눈으로 관찰하면 되는데 형태가 없는 사건은 관측된 사실을 토대로 해석해야 한다. 문제는 방향의 충돌이다. 인간은 자연의 맞은 편에 서 있다. 거울의 상이 뒤집히듯이 거꾸로 보게 된다. 원인과 결과가 뒤집어진다. 우리는 사물의 관측으로 얻은 사실의 조각들을 모아서 퍼즐을 맞추듯이 자연의 질서에 맞게 사건을 재구성해야 한다.
사물의 관찰 - 인간이 결과측을 관찰한다.
사건의 해석 - 에너지가 원인측을 전개한다.
우주 안의 모든 사건은 하나의 플랫폼을 공유한다. 그것은 닫힌계 안에 축과 대칭의 밸런스를 만들고 축을 이동시켜 하나의 밸런스에서 다른 밸런스로 갈아타는 방법으로 계 내부의 에너지적인 모순을 처리하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에서는 5회에 걸쳐 닫힌계 내부에 대칭을 만들고 축을 움직여 의사결정한다. 사건의 해석은 자연의 의사결정구조를 복제하고 사물을 관찰해서 얻은 단서들을 자연의 의사결정 플랫폼의 빈 칸에 채워넣는 방법을 써야 한다.
과학의 단서 - 자연을 관찰하여 단서를 추출한다.
수학의 조립 - 퍼즐조각들의 연관관계를 살펴 순서에 맞게 조립한다.
구조의 복제 - 자연의 플랫폼을 복제하여 퍼즐을 조립하는 방향과 순서를 알아낸다.
사건의 해석이 존재의 본래모습으로 안내하며 사물의 관찰은 필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인간은 사건의 전모를 볼 수 없고 반드시 추론을 거쳐야 한다. 사건의 해석은 퍼즐을 맞추듯이 사물의 관찰로 얻은 단서들을 하나씩 조립하여 자연의 질서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상은 다 맞는데 결정적으로 한 곳이 어긋나 있다. 과학과 수학이 잘 나가다가 마지막 관문에서 막히는 이유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틀어진 부분을 바로잡는 것이 구조론이다.
사건 사물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 있다. 모든 존재가 반드시 거쳐가는 자궁이 있다. 그것은 의사결정이다. 모든 존재는 사건 안에서 결정된 존재다. 구조론은 의사결정과정을 해명한다. 존재의 처음 탄생과정이라는 좁은 관문에서 딱 걸리는 것이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이다. 의사결정이라는 존재의 자궁에 카메라를 들이대면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는 정체를 들키고 만다.
사건은 주사위를 1 회 던지는 것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라는 5회의 내부적인 대칭을 통해 자체의 질서에 따라 가장 효율적인 코스로 주사위의 눈이 결정된다. 1회의 에너지 입력에 의한 의사결정의 결과가 사건이다. 사건은 닫힌계를 지정하여 추가적인 에너지 입력을 차단한다. 자연에서 사건은 변화를 수반하고 변화는 움직이고 움직이면 외부환경과 분리되어 외부영향이 없는 닫힌계가 만들어지므로 내부질서가 추적된다.
사건은 외력의 영향을 배제하고 닫힌계 안에서 축과 대칭의 밸런스에 의한 자체적인 질서로 변화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사건은 추적가능한 변화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사건의 머리와 꼬리를 구분하여 방향성을 판단할 수 있다. 사건은 언제나 원인에서 결과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연결에서 단절로, 입력에서 출력으로, 엔트로피 증대의 일방향으로 간다. 그 역은 없다. 만약 그 역을 봤다면 사건이 아니라 사물을 본 것이다. 역방향 진행은 대개 관측자가 움직인데 따른 오류다. 시합 중에 골대를 옮긴 셈이다. 사건은 대칭을 이용하므로 사건의 방향성을 알면 다음 단계의 진행을 예측할 수 있다. 사건의 머리를 통제하여 꼬리를 연출할 수 있다. 원인을 통제하여 결과를 도출하고, 전체를 통제하여 부분을 도출할 수 있다. 사건의 진행에는 비용이 들고 사건은 비용을 자체조달할 수 있는 한 가지 방향으로 진행하므로 우리는 자연의 그러한 약점을 추궁하여 사건의 전개를 파악할 수 있다. 사건은 최소작용, 최단거리를 지향한다. 그래야 게임에서 이겨서 비용을 조달하기 때문이다. 지면 깨진다.
격물치지라고 했다. 인간이 자연을 관측한다면 객체에 작용을 가하여 되돌아오는 반작용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계의 많은 변화들은 작용반작용의 관측법을 쓸 수 없다. 끝없이 변화하여 모습을 바꾸기 때문이다. 작용을 가하여 반작용을 인지하는 것은 두 사건이 맞물려 돌아가며 나란히 반복되어 위치가 고정된 사물에 해당된다. 사물은 자연의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관측에 종속된 존재다. 관측자는 사물의 외부에 있으므로 내부사정을 알 수 없다. 내부를 알려면 잘게 쪼개야 하는데 쪼개면 더 작은 것이 계속 나와서 허무해진다. 양파껍질 까기다. 사물을 쪼개는 행위 자체가 사건을 구성하는 점에서 추론을 요구한다. 추론이 필요하다면 사물의 직접적인 관측법은 쓸모가 없다.
사건 - 자연의 의사결정구조를 반영한 본래의 모습이며 고도의 추론으로 파악된다.
사물 - 사건이 반복되어 위치와 형태가 고정되므로 추론을 거치지 않아도 왜곡이 많지 않은 일부의 모습.
모든 존재는 탄생과정에서 사건의 성질을 가진다. 사건에 포함되지 않는 순수한 사물은 없다. 사물은 사건의 부분집합이다. 사건이 같은 위치에서 반복되면 사물이다. 인간의 모든 관측은 왜곡된다. 우리가 본 것은 뇌가 해석하여 왜곡을 바로잡은 것이다. 착시현상은 뇌가 해석을 잘못한 것이다. 사물의 성질은 존재 자체의 고유한 성질이 아니라 인간의 관측이 개입한 상대적 성질이다. 색깔은 빛의 파장을 뇌가 해석한 것이다. 까마귀는 검지만 까마귀 눈에는 다르게 보인다. 검다는 것은 인간의 입장이고 까마귀도 자기들 세계에서는 나름 멋쟁이다. 사물의 관측으로 얻은 정보는 왜곡된 정도가 낮을 경우에만 유의미하다.
사물을 여럿 모아서 닫힌계를 이루면 유체의 성질을 띤다. 닫힌계 안에서 균일해진 유체는 자원을 한 곳에 몰아주는 점에서 사건의 성질을 가진다. 사물의 관측은 낮은 수준의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하므로 우리는 사물을 모아서 닫힌계를 걸고 에너지를 투입하고 유체의 성질을 부여하여 사건화 하는 방법으로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
우리는 사물에 고유한 성질이 있다고 믿지만 착각이다. 개체는 성질을 갖지 않는다. 모든 성질은 둘 이상이 모여서 이루는 수학적 성질이다. 사건을 진행하는 공간의 방향과 시간의 순서가 성질이다.
닫힌계
닫힌계는 자연을 수학적인 구조로 만든다. 사건을 파악하려면 외부변수에 의한 교란을 차단해야 한다. 사건은 변화를 일으키고, 변화는 움직이고, 움직이면 주변환경과 떨어져서 닫힌계를 이룬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이륙하고 버스가 정거장을 떠나고 배가 항구를 떠나면 외부에서 개입할 수 없다. 닫힌계 안에서 외력의 영향 없이 내부의 질서에 의해 변화가 일어난다. 변화의 동력을 내부에서 조달하므로 변화에 드는 비용만큼 구조손실이 일어나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다. 닫힌계 안에서 변화량은 자원 총량에서 구조손실을 뺀 만큼 주어지므로 우리는 변화의 다음 단계를 예측할 수 있다. 닫힌계를 확정하려면 인위적으로 외부변수를 차단하거나, 혹은 천문학자가 노이즈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외부변수에 의한 오차를 제거하여 데이터를 보정하거나, 혹은 사건을 키워서 외부 영향력을 상대적으로 감소시켜야 한다. 사건 초기에는 열린계 상태로 외부의 영향을 받지만 사건이 성숙하면 강체가 유체로 바뀌면서 외부의 영향력이 감소한다. 100미터 경주라면 출발하기 전에는 관중의 함성이 영향을 미치지만 일단 출발하면 관중의 응원이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초등학교 1학년 운동회라면 부모의 격려가 도움이 되겠지만 프로선수라면 큰 의미가 없다. 경기 전에는 실력향상에 도움이 되는 음료를 건넬 수 있지만 시합 중에는 불가능하다. 세상에 복잡한 것은 같은 것의 중복과 다른 것이 끼어드는 혼잡 때문이다. 닫힌계는 계를 닫아걸고 혼잡을 차단하여 사건을 파악할 수 있게 만든다.
엔트로피
자연의 궁극적인 힘은 우주가 처음 탄생할 때 주어졌던 빅뱅 당시의 관성력이다. 그것이 각운동량의 형태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자연의 여러가지 형태들은 서로 충돌하여 각운동량이 수렴된 것이다. 그 수렴의 형태가 물질을 구성하는 빛과 기본입자와 전자와 양성자와 원자다. 우주 안의 모든 변화는 궁극적으로 각운동량의 수렴이다. 각운동량이 수렴되기 전 상태를 위치에너지 곧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라고 하고 수렴된 상태를 운동에너지 곧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라고 한다. 자연에서 인간의 개입이 없이 저절로 일어나는 변화는 닫힌계 안에서 각운동량이 수렴된다. 국소적으로 확산될 수 있지만 닫힌계 전체로 보면 언제나 수렴이 확산보다 크다. 수렴이 더 효율적인 배치이기 때문이다. 충돌하면 수렴이 이긴다. 그러므로 에너지는 언제나 수렴된다. 2와 1이 충돌하면 2가 이긴다. 1이 2를 깰 확률보다 그 반대의 확률이 높다. 그러므로 수렴되어 3이 된다. 분자 둘에서 하나로 줄었으므로 더 수렴할 가능성은 감소했다.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줄어든 것이다. 에너지의 사용은 확산을 수렴으로 바꾸는 것인데 수렴된 만큼 더 수렴할 수 없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다. 외부에서 개입하면 수렴을 확산으로 되돌릴 수 있지만 닫힌계 안에서 자체적으로는 의사결정비용의 제한 때문에 절대로 안 된다. 닫힌계를 걸면 세상이 의사결정비용을 자체조달할 수 있는 한 방향으로 작동하므로 이러한 변화가능성의 제한을 이용해서 꽤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
뭐든 닫아걸고 빠듯하게 만들어 놓으면 말을 잘 듣는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물질이든 고분고분해진다. 반항을 하려고 해도 의사결정이 필요한데 그 과정에 드는 비용이 부족해서 대항을 못한다. 늑대에게 쫓기는 사슴은 직진만 계속한다. 90도로 꺾으면 되는데 그러려면 속도를 줄이고 생각을 해야 한다. 그것도 비용이다. 쫓기면서 빠듯한 상태에서 그 비용을 조달할 방법이 없으므로 사슴은 방향전환을 못하는 것이다. 무한동력이 안 되는 원리나 사슴이 방향을 틀지 못하는 이유나 같다. 의사결정비용이 언제나 변화에 제한을 건다. 닫힌계 안에서 변화는 비용의 자체조달이 가능한 한 방향으로만 일어난다. 계 내부의 사정이 빠듯해지는 이유는 의사결정이 대칭을 쓰기 때문이다. 내부가 50 대 50으로 팽팽하지 않으면 의사결정에 따라오지 않고 일부가 떨어져 나간다. 갑자기 움직이면 모자가 벗겨진다. 의사결정에 실패하는 것이다. 성공하는 의사결정은 대칭을 이루고 대칭은 빠듯하다. 90 대 10이면 여유가 있겠지만 그 경우 10이 떨어져 나가서 존재가 깨진다. 자연은 언제나 한계까지 가 있다. 나무는 너무 많은 씨앗을 퍼뜨리고 풀은 너무 많은 꽃을 피운다. 도루묵은 산란기에 바다가 뿌옇게 될 정도로 정자를 방사한다. 도무지 위험에 대비하여 비축하고 대비하는게 없다. 인간은 예외적으로 허리춤에 배둘레햄을 비축하지만 말이다.
복잡성
구조는 복잡의 반대말이다. 살을 제거하면 뼈가 남는다. 그것이 구조다. 사건에서 복잡을 제거하면 구조가 남는다. 복잡의 복은 같은 것이 중복된 것이며, 잡은 이질적인 것이 섞여서 혼잡한 것이다. 닫힌계를 지정하여 복잡성을 걸러내고 계를 단순화 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사건의 전개과정을 추적하여 사건의 다음 단계를 예측할 수 있다. 사건에 개입하여 다음 단계의 변화를 조절할 수 있다. 사건은 방향성이 있으므로 점점 커지며 사건이 커지면 단순화 된다. 초기의 복잡성은 사라지고 구조가 드러난다. 강체가 유체로 바뀌면 수학적 법칙에 지배된다. 초기의 각운동량이 수렴되어 자원을 한 곳에 몰아주므로 방향성을 추적할 수 있다. 초기의 다양성이 상호작용 과정에서 상쇄되고 용해되어 개별적인 성질을 감추고 보편적인 원리를 따르게 된다. 큰 수의 법칙이 작용하여 확률을 믿을 수 있게 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
사건은 닫힌계 안에서 5회에 걸쳐 단계적인 의사결정을 거친다. 의사결정은 대칭을 사용한다. 대칭은 맞물리는 접점을 공유하여 축을 발생시킨다. 의사결정은 계 안에서 대칭과 비대칭을 반복하며 하나의 밸런스에서 또다른 밸런스로 옮겨간다. 균일한 계에 외력이 작용하면 내부는 모순상태다. 모순이 배출될 때 까지 사건은 진행된다. 외력을 작용측에 되돌리거나, 회전이나 온도의 형태로 내부에 고루 분산하거나, 열과 빛과 진동의 형태로 배출하거나다. 계 내부가 균일하지 않으면 외력에 의해 계가 깨진다. 균일한 계는 외력과 내력의 균형을 도출한다. 구심력과 원심력의 균형이 코어를 만든다. 관성력이 코어의 위치를 옮기는게 의사결정이다.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량은 침투한다. 질은 외력과 내력의 대칭으로 균일한 계를 만들고, 입자는 원심력과 구심력의 대칭으로 코어를 도출하며, 힘은 순방향과 역방향의 대칭으로 코어의 공간적 이동방향을 결정하고, 운동은 시간적 순서의 대칭으로 코어의 이동과정을 진행하며, 량은 겉과 속의 대칭으로 에너지를 외부로 배출하고 사건을 종결한다. 영구운동을 계속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외부의 관찰자 입장이고 내부적으로는 운동상태로 정지한 것이다. 지구는 태양 주변 궤도를 장악하고 태양과 상호작용하며 정지해 있다.
우리는 자연의 변화를 운동과 량으로 포착한다. 량은 칼라와 소리, 열과 같은 직접 정보다. 운동은 변화과정이 움직임의 형태로 인간의 시야에 전시된다. 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운동의 크기를 결정하므로 추론하여 알 수 있다. 입자는 코어가 내부에 감추어져 있지만 사건이 반복되면 코어가 보강되므로 파악된다. 과일의 핵이 단단한 이유도 코어가 보강되기 때문이다. 코어가 약하면 외력의 작용에 버티지 못하고 코어에서부터 깨진다. 계는 내부가 균일하고 외부에 대해 닫혀 있으므로 알 수 있다. 움직였을 때 따라가는 부분이 계다.
시스템 메커니즘 스트럭쳐 액션 코드
에너지의 입력, 변화의 시작점, 의사결정, 변화의 도착점, 에너지의 출력으로 다섯 가지가 구조가 있다. 외력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외력를 처리하는 변화를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코어를 어디로 옮길 것인가? 변화를 어디까지 진행할 것인가? 변화를 어떻게 종결할 것인가? 하나의 사건에서 이 다섯가지가 결정되어야 한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구조는 세번째 스트럭쳐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에서 세번째 힘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의사결정이 일어나고 나머지는 보조한다. 모든 도구나 장치에는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뾰족한 첨단부가 있다. 칼의 날과 같고, 볼펜의 촉과 같고, 전축의 바늘과 같다. 모래시계의 가운데 잘록한 부분이다. 의사결정은 대칭의 센터에서 진행방향을 정하므로 뾰족할 수 밖에 없다. 센터는 하나의 점이고 모든 구조는 의사결정이 시작되는 뾰족한 출발점을 가진다. 우리가 만들어서 사용하는 도구는 스트럭쳐가 외부에 노출된 아날로그다. 손이 질이면 칼은 입자, 칼날은 힘, 생선은 운동, 도마는 량이다. 구조를 내부로 감추면 디지털이다. 메커니즘은 두 개의 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형태다. 이때 톱니가 맞물리는 부분이 스트럭쳐다. 모래시계의 가운데 잘록한 부분, 천칭저울의 가운데 두 접시가 맞물리는 센터다. 메커니즘에 에너지 입력부를 추가하면 시스템이 된다. 시스템은 자체동력으로 에너지를 순환시킨다. 시스템이 아닌 메커니즘은 사람이 손으로 작동시켜야 한다. 동력을 공급하는 모터가 달린 기계장치에서 모터를 빼고 나머지가 메커니즘이다. 물레방아는 물레와 방아를 연결한 것이다. 그 연결부위가 구조다. 물이 없어서 손으로 바퀴를 돌리면 실을 잣는 물레다. 물레는 시스템이 아닌 메커니즘이다. 물을 공급하여 물레방아가 저절로 돌아가면 시스템이다. 디딜방아의 메커니즘은 디딜부 A의 변화를 방아부 B의 변화로 전달한다. 양자를 통일하는 C가 갖추어지면 시스템이다. 액션은 외부에 움직이는 노출되는 부분이다. 디딜방아라면 확을 때리는 방아공이다. 코드는 결과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물레방아의 방아확이다. 자연은 모두 시스템으로 존재한다. 메커니즘, 스트럭쳐, 액션, 코드는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자연의 시스템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명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에너지가 없이는 존재가 불가능하므로 남산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커다란 자연계 시스템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이다. 자연에는 태풍이나 소용돌이와 같이 일시적으로 시스템이 만들어졌다가 에너지가 고갈되어 깨지는 일이 흔하다.
헷갈리는 것은 일이 중첩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제작하여 쓰는 도구는 두 가지 일을 한다. 하나는 사람의 힘을 도구가 일하는 대상에 전달하는 것이다. 사람의 힘을 전달하는 일로 보면 간단한 도구에도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그냥 돌멩이에도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있다. 그냥 가만이 있는 것도 중력을 전달하고 외력을 견디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로 무를 썰든, 드라이브로 나사를 돌리든, 펜으로 글을 쓰든 작업을 일로 보면 반은 도구에 있고 반은 대상에 있다. 구조분석에서 헷갈리는 점은 어떤 것을 일로 정할지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작업으로 보면 둘이 맞닿는 부분이 스트럭쳐다. 즉 인간의 도구는 질, 입자, 힘이고 그 도구가 작업하는 대상이 힘, 운동, 량이다. 칼이라면 사람의 힘을 전달하는 일로 볼때 손잡이가 질, 칼몸이 입자, 칼등이 힘, 칼날이 운동, 칼끝이 량이지만 호박을 자르는 일로 볼 때는 손잡이가 질, 칼몸이 입자, 칼날이 힘, 호박이 운동, 썰어진 호박이 량이다. 실제로는 포함관계를 이루므로 어디까지가 질이고 입자라고 딱 구분할 수 없다. 손잡이만 질이 아니고 질은 결합하므로 사람의 손과 결합하는 부분은 모두 질이다. 칼 전체가 질이지만 주로 손잡이가 질을 담당한다. 외형은 편의상 구분한 것이고 실제로는 일을 따라 나누어야 한다. 입자는 질에, 힘은 입자에, 운동은 힘에, 량은 운동에 포함되므로 일의 진행에 따라 작업하는 부위가 전체에서 부분으로 압춝되는 것이다. 질은 펜 전체가 글을 쓰지만 양은 펜촉만 쓰는 것이다.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
사건을 일으키는 원인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방정식으로 표현되는 수학적 모형화다. 정확히 말하면 비례다. 이쪽에서 A만큼 입력했는데 저쪽에서 B만큼 출력된다면 그것이 에너지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각운동량의 수렴과정에서 힘의 방향이 바뀌기 때문이다. 사건 안에서 힘은 언제나 확산에서 수렴으로 바뀐다. A만큼 확산이 방향을 바꾸어 B만큼 수렴될 때 그것이 에너지다.
사건의 원인을 추궁하여 궁극적인 단계에 이르면 존재가 고유한 성질을 부정당하고 힘을 한 지점에 몰아주는 유체의 성질이 작용하므로 오로지 수학적인 계측만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에너지로 정의된다. 물은 스며들고, 나무는 자라고, 돌은 구르고, 쇠는 무거운 것은 에너지가 아니라 고유한 성질이다. 그러나 소립자 단계까지 쪼개면 그런 2차적으로 획득한 성질은 의미가 없어진다. 궁극적인 단계에서 개체는 의미가 없고 여럿이 모여서 유체의 균일한 성질을 가진다. 유체는 닫힌계 안에서 축과 대칭의 밸런스를 이루고 부분이 전체를 대표한다. 천칭은 살짝 건드려도 전체가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런 팽팽한 유체 특유의 긴장상태가 되는 것이 에너지다. 유체는 균일하고 균일하면 몰아주고 몰아주면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여 극히 예민하게 반응한다. 에너지란 존재의 고유한 각운동량이 유체의 성질에 의해 한 방향으로 수렴된 것이다.
존재가 빅뱅 당시에 획득한 고유한 각운동량이 수렴되어 나란히 움직이면 겉보기로는 정지한 것처럼 보이는게 물질이다. 계 내부의 모순에 의해 나란함이 깨지는 것이 공간이요, 새로운 나란함을 찾을때까지 변화가 증폭되어 닫힌계 전체에 전달되는게 시간이다. 그 여파가 외부의 관측자에게까지 전달된 것이 정보다. 에너지는 외부에서 건드리면 즉각 반응하는 예민한 저울상태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이 대표적이다. 물질은 그러한 에너지의 성질이 수렴되어 나란함 속에 가두어진 것이다. 공간은 그 감추어진 것을 다시 밖으로 꺼내고 시간은 그것을 한줄로 쭉 펼쳐놓는다.
에너지는 확산을 감추고 있고, 물질은 수렴을 감추고 있고, 공간은 다시 꺼내되 한 방향으로 몰아주며, 시간은 한 줄로 밀고가고, 정보는 그것을 관측자에게 전달한다. 에너지 - 풍선은 공기의 확산을 가두고 있다. 입자 - 풍선을 건드리면 대표자가 되는 운돟중심 한 점이 풍선의 전체 진행방향을 결정한다. 공간 - 풍선효과에 의해 이쪽을 누르면 저쪽이 밀려나온다. 시간 - 한 번 나오기 시작하면 계속 나온다. 정보 - 나오는 모습이 관측자에게 포착된다.
확산 수렴, 마이너스 플러스, 연결 단절
우리는 물질을 잘게 쪼개서 가장 단순한 것에 도달하려고 하지만 의미가 없다. 단순한 것은 성질을 갖지 않는다. 성질은 외력의 작용에 반응한다. 가장 단순한 것은 반응하지 않는다. 반응은 힘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방향을 바꾸려면 이겨야 하는데 가장 단순한 것은 진다. 거울에 빛이 반사된다면 거울이 이긴 것이다. 반대로 그냥 빛이 투과한다면? 거울이 진 것이다. 지면 반응하지 않고 반응하지 않으면 존재가 부정당한다. 진공은 빛에 반응하지 않으므로 존재가 없다. 가장 단순한 것은 성질을 가질 수 없으므로 독립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빌붙어 있다. 관측자의 작용보다 작은 것은 관측될 수 없다. 빛을 관측하려면 빛보다 작은 것으로 빛을 때려서 반응이 되돌아오게 해야 한다. 결국 객체가 스스로 자신을 관측하기를 기대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러려면 최소 객체 2가 필요하다. 빛이 자신을 둘로 나누어 간섭하는 이중슬릿 실험과 같다. 각운동량을 가진 객체 2의 간섭이 에너지라면 객체 2가 파동의 상쇄로 에너지가 수렴되어 나란해진 1이 물질이다. 물질은 내부에 2를 감춘 1이다. 빛은 전기장과 자기장 2를 내부에 감추고 있는 물질이다. 이것이 우주의 궁극적인 모습이다.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자체적인 변화는 각운동량을 가진 확산상태의 에너지가 수렴되어 물질로 바뀌어 형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닫힌계 안에서 일어나는 에너지의 자체적인 변화는 의사결정비용조달의 문제 때문에 모두 확산에서 수렴으로 가는 한가지 형태를 따른다.
닫힌계 안에서 에너지의 최초상태를 확산으로 보면 거기서 일어나는 자체적인 변화는 수렴 뿐이며 그것은 각운동량을 손실하는 마이너스다. 닫힌계는 내부자원의 균일한 연결을 의미하므로 거기서 일어나는 변화는 단절 뿐이다. 이쪽의 마이너스는 다른 곳에서 플러스로 결과한다.
확산 -> 수렴
마이너스 -> 플러스
연결 -> 단절
유체 -> 강체
위치에너지 -> 운동에너지
상부구조 -> 하부구조
우리는 화살이 활을 이탈하는 마이너스를 보지 못하고 과녁에 화살이 날아와 꽂히는 플러스에 주목한다. 플러스가 사건의 원인이라고 착각한다. 플러스를 늘려서 이득을 취하려고 한다. 그러나 플러스는 각운동량을 상실하므로 통제할 수 없다. 플러스의 수렴은 물질의 형태를 획득하는 대신 에너지의 통제가능성을 잃는다. 유체의 몰아주는 성질을 잃는다. 포크레인의 삽날도 유압장치에 종속시켜야 통제되는 것처럼 강체는 그 자체로는 통제되지 않으며 유체 안에서 기능한다. 우리는 이 부분을 헷갈려서 실수하는 것이다. 뼈는 강체고 근육은 유체다. 뼈는 근육 안에서 통제된다. 뭐든 얻으려고 하면 잃을 것이요, 어차피 잃을 부분을 잘 관리하면 얻을 것이다. 마이너스와 플러스, 연결과 단절, 유체와 강체는 세트로 움직이지만 마이너스측이 더 크고 앞서며 사건의 원인측을 구성한다. 우리는 사건의 마이너스측에 개입하여 조절하는 방법으로 사건을 핸들링할 수 있다. 플러스를 추구하면 우연한 행운에 기대거나 에너지를 가진 다른 사람에 의존하다가 종속된다. 길들여지고 제압된다.
위치에너지 운동에너지
상호작용하는 복수의 자원들이 각운동량을 보존한 상태가 위치에너지라면 각운동량이 수렴된 상태가 운동에너지다. 우리는 위치에너지를 수렴하여 운동에너지로 바꾸는 방법으로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다. 운동에너지는 이미 진행중인 운동의 진행방향을 바꿀 수 있을 뿐 새로 사건을 격발할 수 없다. 시스템과 메커니즘은 위치에너지를 가지고 스트럭쳐와 액션은 운동에너지를 가진다. 질-입자-힘은 위치에너지를 가지고 힘-운동-량은 운동에너지를 가진다. 물레방아의 물레가 위치에너지라면 방아는 운동에너지다. 무한동력의 오류는 운동에너지를 위치에너지로 착각한 것이다. 운동에너지는 이미 사용중인 에너지다. 사용방법을 바꿀 수 있을 뿐 새로 사용할 수는 없다. 에너지는 확산을 수렴으로 바꾸는 방법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 확산은 공간을 장악하므로 공간을 줄이는 형태로만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무슨 기관을 만들었다면 반드시 공간을 들고 나와야 한다. 즉 실린더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연기관은 실린더가 있고 증기기관도 마찬가지이며 수력발전은 물그릇이 있고 풍력발전이라도 바람개비의 면적만큼 바람그릇이 있다. 깔때기 모양으로 부피를 축소하는 방법으로만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다.
상부구조 하부구조, 유체 강체
물레방아는 물레부와 방아부의 결합이다. 부드러운 유체의 물레부가 상부구조, 단단한 강체의 방아부는 하부구조다. 부드러운 근육은 유체, 단단한 뼈는 강체다. 자동차 엔진이라도 부드러운 실린더 내부의 개스는 유체, 힘을 전달하는 피스톤은 강체다. 유체는 상부구조, 강체는 하부구조를 이룬다. 유체는 2고 강체는 1이다. 부피를 가진 유체의 확산 2를 부피가 없는 강체의 수렴 1로 바꾼다.
질-입자-힘은 상부구조, 힘-운동-량은 하부구조다. 에너지를 들여오는 위치에너지가 상부구조, 에너지를 전달하는 운동에너지가 하부구조다. 사건은 중첩되어 있으므로 항상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윗선이 있다. 에너지의 입력측이 상부구조, 출력측이 하부구조다. 개인이 하부구조라면 가족이나 집단이 상부구조가 된다. 직원이 하부구조라면 회사가 상부구조다. 단순히 사건의 이전단계를 상부구조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 경우는 질이 상부구조, 입자가 하부구조다. 마찬가지로 입자가 상부구조면 힘은 하부구조다. 에너지는 언제나 상부구조에서 하부구조로의 일방향으로 움직인다. 상부구조는 유체와 같으니 상호작용이고 하부구조는 강체와 같으니 일방작용이다. 유체는 힘을 생산하고 강체는 힘을 전달한다.
사건은 외부의 영향을 받는 열린계에서 강체 -> 유체로 발전하고 외부의 개입이 불가능한 닫힌계에서 유체 -> 강체로 수렴한다. 닫힌계를 지정하지 않으면 사건은 강체 -> 유체 -> 강체를 오가며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닫힌계를 걸고 사건 내부의 메커니즘으로 볼 때 사건은 언제나 유체 -> 강체의 일방향성을 가진다. 에너지는 확산에서 수렴의 일방향으로 간다. 진보는 상부구조에 유체이고 보수는 하부구조에 강체다. 전략은 상부구조에 유체이고 전술은 하부구조에 강체다. 사건의 원인은 언제나 집단의 상호작용 곧 유체의 모습을 가진다.
차원
차원은 에너지가 한 지점에 동시에 맞물리는 정도다. 맞물린 상태에서 에너지 작용이 밸런스의 모순을 일으키면 맞물림을 해소하는 형태로 의사결정이 일어난다. 간단히 말하면 깨진다. 계는 체로 깨지고, 체는 각으로, 각은 선으로, 선은 점으로 깨진다. 궁수가 활에 활줄과 화살을 매기고 손으로 잡으면 네 방향의 힘이 하나의 꼭지점에 맞물린 4차원이다. 궁수가 손을 빼면 화살이 날아가고 맞물림이 풀리며 차원이 감소하여 최종적으로 0차원 점에 이른다. 궁수가 활과 활줄과 화살을 잡은 상태가 4차원 계, 궁수를 제외하고 활과 활줄과 화살이 3차원 체, 궁수와 활이 빠지고 활줄과 화살이 2차원 각, 활줄도 빠지고 화살이 1차원 선, 화살이 과녁에 박힌 지점이 0차원 점이다.
축구시합이라면 두 팀과 심판과 관객에 그라운드까지 다섯이 맞물려 사건을 이룬다. 선수가 관객과 심판 역할을 겸할 수 있으므로 최소 둘이 필요하다. 둘의 접점이 0차원 점이다. 두 사람이 일대일 축구를 해도 나머지 포지션들이 생략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실제로 자연에 존재하는 것은 4차원 계다. 0, 1, 2, 3차원은 말하기 좋도록 일부를 생략한 것이다. 관련자를 전부 끌어들이면 복잡하므로 일부를 생략하고 핵심 당사자인 선과 면만 건드리자고 약속하는 것이다.
원래 수학자가 좌표에 1차원 선과 2차원 면을 그렸는데 나중에 평면에 그릴 수 없는 3차원 입체를 억지로 그리고, 내친 김에 아인슈타인의 시간 4차원과 0차원 점까지 일을 크게 벌여놓은 것이다. 수습이 안 되고 있다. 그것은 사람 사이의 약속이고 자연에는 그런 것이 없다. 자연은 네 방향의 사면체에 이들이 맞물린 꼭지점을 포함하여 다섯 방향의 에너지가 4차원 계를 이루며 그 외에는 존재가 없다. 의사결정이 언제나 4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건은 닫힌계 안에서 기승전결로 전개해 간다. 사건이 상당히 진행되었다면 계는 더 이상 의사결정에 관여하지 않으므로 뺀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순서에 따라 질이 결정되면 계를 빼고, 입자가 결정되면 체를 빼고, 힘이 결정되면 각을 빼고, 운동이 결정되면 선을 뺀다. 하나씩 빼서 최종적으로 량이 남으면 점이다. 점은 0차원이므로 맞물림이 없다. 점은 선이 끊어지는 지점이고 끊어졌으므로 사건은 끝이다. 에너지가 계를 빠져나가는 지점이 점이고 나머지는 그 점을 확정하는 절차다.
활은 활시위의 각에서 각에서 화살의 선을 거쳐서 과녁의 점으로 빠지고, 총알은 약실의 각에서 총신의 선을 거쳐서 총알의 점으로 빠진다. 천칭은 두 접시가 한 점에 맞물린 계에서, 한쪽 접시로 기울어진 체, 기울기를 결정하는 각, 기울어지는 동선의 선을 거쳐 눈금의 점으로 끝난다. 인체라 해도 체중의 계에서 근육의 체, 팔꿈치의 각, 손가락의 선을 거쳐 손톱의 점으로 에너지가 빠져나간다. 자연의 모든 존재의 모든 변화는 4, 3, 2, 1, 0차원으로 갈 뿐 그 외에는 없다. 3, 2, 1은 거쳐가는 정거장들이며 격발하는 것은 4차원이고 끝나는 것은 0차원이다.
물리학자들이 26차원까지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여러 개의 사건을 중첩시킨 것이다. 자연은 다섯이 한 지점에 맞물리는 4차원에서 밸런스가 격발된다. 4차원은 자연의 실제이고 3, 2, 1, 0차원은 인간의 관념이다. 사건이 복잡하므로 일부만 발췌해서 보자는 약속이다. 가만이 있는 돌멩이도 외력에 저항하고, 중력과 싸우고, 무게중심을 유지하므로 내부에 코어가 있어서 4차원이다. 차원이 하나라도 부족하면 존재가 무너진다. 왜냐하면 3, 2, 1, 0차원은 자연의 붕괴과정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체의 표면에서 면을 찾고 선을 발견하지만 그것은 붕괴의 흔적이다.
수학의 차원은 0차원에서 1, 2, 3, 4차원으로 커지는 방향이다. 구조론의 차원은 4차원 계로 시작하여 체, 각, 선, 점으로 작아지는 방향이다.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가 있다. 자연에서 가장 작은 형태는 사면체다. 사면체는 네 개의 꼭지점을 가진다. 이때 네 꼭지점은 서로를 공유한다. 여기서 하나만 빼도 형태가 무너져서 존재가 부정된다. 그러나 이는 인간와 관찰이고 자연에 사면체는 존재할 수 없다. 압이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면을 연결하여 묶어줄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 보통은 전자기력으로 묶여 있다. 넷을 묶어주는 코어까지 다섯이 하나의 존재를 이룬다. 그 상태는 에너지의 확산이 수렴으로 바뀌는 모순이며 밸런스가 무너져서 깨질 때 차원을 하나씩 빼서 중첩을 빼면 3차원 체, 코어를 빼면 2차원 각, 대칭의 맞물림을 빼면 1차원 선, 접점을 빼면 0차원 점이다. 중첩이 없으면 의사결정이 불가능하고, 꼭지점인 코어가 없으면 맞물리지 않아 크기를 가질 수 없고, 두 방향의 대칭이 없으면 구조로 엮일 수 없고, 접점이 없으면 관측자가 그것을 가리킬 수도 없다.
계 체 각 선 점
구조론 차원은 형태가 아니라 에너지를 본다. 자연의 실제는 에너지고 형태는 인간의 해석이다. 인간의 눈이 평면이므로 3차원과 4차원은 볼 수 없다. 홀로그램으로 3차원을 볼 수 있지만 억지다. 우리가 3차원을 보는 것은 뇌가 2D를 3D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을 잘 하면 4차원도 볼 수 있다. 천칭의 축에 두 접시의 에너지가 맞물린다. 잘 하면 중력을 볼 수 있다. 지렛대의 길이를 참고하여 받침점에 가해지는 힘의 크기를 볼 수 있다. 활시위의 당겨진 정도를 보고 화살에 가해지는 힘의 크기를 볼 수 있다. 무게중심, 힘의 중심을 볼 수 있다. 질량을 볼 수 있다. 질량은 상태를 변경하는데 드는 힘이다. 자동차의 속도를 보고 그 자동차을 멈춰세우는데 드는 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4차원은 유체의 압으로 존대한다. 우리는 기압이나 수압을 볼 수 없다. 집단에 걸린 스트레스의 강도를 볼 수 없다. 그런데 볼 수 있다. 고무공이 벽에 맞고 튀어나오는 장면을 고속카메라로 촬영하면 고무공이 짜부라지는 정도를 보고 내부에 걸린 압력을 볼 수 있다. 헤머던지기를 하는 선수가 헤머를 돌리는 모습을 보고 헤머에 걸린 힘의 크기를 알 수 있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4차원이다. 4차원은 3차원 입체에 에너지 공급자를 더한 것이다. 아기는 탯줄을 끊고 엄마로부터 독립하지만 우주 안에 완전한 독립은 없으며 반드시 에너지를 외부에 의존한다. 궁극적으로는 태양이 인간의 에너지원이다. 태양이 식물을 키우고 식물이 동물을 키우고 인간이 그것을 먹는다. 독립은 의사결정의 독립일 뿐이며 완전한 독립이 아니다. 사건은 중첩된다. 사건 속에 또다른 사건이 있다. 사건 속에서 또다른 사건의 독립이지 완전한 독립은 아니다.
계는 에너지의 중첩이며 계에서 중첩을 빼면 남는 것이 체다. 사과를 따면서 꼭지를 뗀 것이다. 외부의 에너지 공급자로부터 입자가 독립한다. 계의 의미는 의사결정이 외부->내부로 방향전환을 하는 것이다. 닫힌계 안에서 에너지는 확산에서 수렴으로 바뀐다. 계는 내부에 코어가 성립하므로 무게중심, 질량중심이 반드시 있다. 중첩이 소멸하여 코어가 외부로 노출되면 체다. 무게중심이 되는 물체의 내부 꼭지점이 코어다. 체에서 계로 바뀌면 중첩이 사라지므로 내부가 텅 비었다고 간주된다. 체는 코어가 밖으로 노출된다. 자궁속의 아기라면 배꼽이 코어다. 자궁 속에서는 엄마와 아기가 중첩상태의 계를 이룬다. 아기가 탄생하면 배꼽이 외부로 노출된다. 사면체에서 외부에 노출된 꼭지점이 코어다. 사면체의 코어는 나머지 세 점을 공유한다.
수학의 3차원은 부피를 의미하지만 구조론의 체는 부피를 만드는 그릇이다. 하나의 센터에서 세 방향으로 간격을 벌려야 부피를 담을 수 있다. 천칭에 매다는 접시는 줄이 셋이라야 한다. 손가락은 최소 셋이라야 사과를 딸 수 있다. 손바닥까지 넷이 3차원을 이룬다. 손바닥에 손가락 셋이면 천칭의 접시와 같다.
계에서 체로 바뀌는게 의사결정이다. 그것은 코어를 밖으로 꺼내는 것이다. 사과를 둘로 쪼갠다면 밖으로 씨방이 밖으로 노출된다. 지렛대의 받침점이 코어다. 각은 받침점을 제거한 것이다. 궁수가 활을 당기면 계, 화살을 놓아버린게 체, 화살이 떠나버린게 각이다. 이제 활과 시위의 대칭만 남는다. 활시위가 활에서 풀린게 선이다. 활시위가 끊어진 지점이 점이다.
구조론에서 면이라고 하지 않고 각이라고 하는 이유는 꼭지점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꼭지점은 둘이 겹치는 부분이다. 겹치는 부분을 이동하여 의사결정한다. 각은 겹치는 부분을 이동시킬 수 없다. 계는 중첩에 의해 압이 걸려서 밀도가 있고, 체는 꼭지점이 되는 외부로 드러나 있고, 각의 꼭지점을 자르면 선이 되는데 선은 꼭지점이 없다.
계 - 꼭지점을 이동시킬 수 있다.
체 - 꼭지점을 틀 수 있다.
각 - 꼭지점을 없앨 수 있다.
선 - 꼭지점이 없다.
점 - 대칭이 없다.
꼭지점을 관측자라 할 수 있다. 우주공간에 아무 것도 없고 어떤 둘만 있다면 A가 B로 가든 B가 A로 가든 같다. 꼭지점이 없으면 방향이 불성립이다. 크기가 불성립이다. 거리가 불성립이다. 어떤 변화가 일어나든 관측자가 없으므로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때 둘이 공유하는 제 3자가 있어야 방향이 있고 질서가 있고 크기가 있고 거리가 있다. 그 공유하는 지점이 꼭지점이다. 꼭지점이 관측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선은 관측자가 없으므로 게임으로 말하면 심판이 없어서 져놓고 이겼다고 우겨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보통 말하는 상대성이다. 점은 선이 끊어지는 지점이다. 점은 선에 빌붙어 있을 뿐 독립적으로는 존재가 없다. 보통 우리가 종이에 점을 찍어놓고 거기에 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점을 보는 관측자인 인간과의 연결선이 있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것이다.
저울 됫박 콤파스 자 수
차원이 다섯인데 숫자로 4차원, 3차원, 2차원, 1차원, 0차원이라고 하면 헷갈린다. 계차원, 체차원, 각차원, 선차원, 점차원이라고 해야 헷갈림을 방지할 수 있다. 도량형은 '저울, 됫박, 컴퍼스, 자, 수'가 있다. 수는 한 개, 두 개 하고 숫자를 세는 낱 개다. 곧 점이다. 수가 모이면 자가 되고, 자가 모이면 컴퍼스가 되고, 컴퍼스가 모이면 됫박이 되고, 됫박이 모이면 저울이 된다. 그릇처럼 내용물을 담을 수 있는 용기가 됫박이다. 되斗가 맞지만 그릇을 말하는지 거기에 담기는 양을 말하는지 헷갈리므로 됫박이라고 쓰자. 됫박 두 개를 연결한 것이 천칭저울이다. 대저울도 원리는 천칭과 같다. 아인슈타인이 시간을 4차원이라고 한 것은 됫박을 움직이는 거리의 곱이 저울의 무게와 같다는 말이다. 대저울의 추가 이동한 거리만큼 시간이 걸리므로 상대성이론의 등가원리에 따라 시간의 곱 만큼 무게를 갈음한다.
자연의 어떤 존재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반드시 외부와 연결되어야 하며 그 연결된 정도가 질량이다. 질량이 크다는 말은 연결강도가 크다는 말이다. 빛은 연결이 끊어져 질량이 없지만 움직이는 시간의 곱이 질량과 같다. 등가원리에 따라 빛을 멈추게 하는데 드는 비용이 질량과 같다. 빛은 공간을 직선으로 진행한다. 축에 잡혀서 계 내부에서 광속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질량이다. 질량은 빛이 축에 잡혀 멈추어진 정도를 나타낸다. 반대로 광속은 빛의 탈출속도다. 광속은 질량이 있는 물질 내부의 의사결정 속도와 같다. 활은 화살을 쏘고, 전자는 빛을 쏜다. 천칭은 됫박을 쏘고, 됫박은 컴퍼스를 쏘고, 컴퍼스는 자를 쏘고, 자는 수를 쏜다. 눈금을 쏘는 것이다. 물질의 형태는 쏘아진 화살이 되돌아가서 나란한 것이다. 이쪽에서 쏘는 만큼 저쪽에서도 쏘아서 균형이면 그게 물질의 상호작용이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저울이다. 저울 아닌 것은 없다. 저울이라야 외력의 작용에 반응할 수 있다. 저울은 축에 잡혀 지구와 연결된다. 반드시 외부와 연결이 있어야 한다. 연결은 겹침이다. 사과꼭지가 사과에 속하면서 동시에 나무에 속하듯이 겹친다. 쇠사슬은 연결부위가 겹쳐져 중첩된다. 우리는 어떤 물체 A와 B가 겹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전자기력 때문이다. 전자기력을 제외하면 그릇에 무한히 담을 수 있다. 됫박은 쌀을 담을 수 있다. 스펀지도 물을 담는다. 전자기력을 제외하면 속이 빈 그릇이 아니라 꽉찬 돌멩이라도 블랙홀처럼 무한히 담는다. 대표적인 예가 지렛대의 받침점이다. 지렛대의 길이에 비례하여 에너지를 감당한다. 무한히 긴 지렛대에 눌려 받침점이 찌그러진게 블랙홀이다.
입체는 크기가 있고 평면은 너비가 있을 뿐 크기가 없지만 실제로는 입체도 크기가 없다. 원리적으로는 무한이 중첩될 수 있다. 중첩된 정도가 질량이며 그 중첩을 반영하는게 저울이다. 중첩이 없이는 존재가 없지만 중첩이 없다고 치면 입체, 입체의 코어를 무시하면 면, 면의 대칭을 부정하면 선, 선의 연결을 부정하면 끊기는 지점이 점이다. 천칭저울을 계속 때려부수는 것이다. 천칭의 두 접시를 분리하면 입체, 접시를 매다는 고리를 잘라버리면 바닥의 납작한 부분이 면, 면을 가위로 자르면 선, 선을 자르면 절단부가 점이다. 이는 생각하기 좋도록 성질을 발췌한 인간의 관념이고 자연은 중첩되어 4차원 계로 존재한다.
소재 기능 성능 효능 외양
산업의 혁신은 소재, 기능, 성능, 효능, 외양으 로 다섯 차례 일어난다. 이는 주변과 동시에 맞물리는 정도를 나타낸다. 가장 차원이 높은 소재가 주변과 더 많이 맞물리며 소재가 바뀌면 이에 연동시켜 모두 바꾸어야 한다. 반대로 외양의 디자인이 바뀌었다고 내용을 바꿀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산업의 경쟁은 소재경쟁, 기능경쟁, 성능경쟁, 효능경쟁, 외양의 디자인 경쟁 순으로 일어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소재가 바뀌면 기능이 바뀌므로 다 바꿔야 한다. 목재에서 플라스틱으로 소재가 변하면 이에 연동되어 기능의 혁신이 일어난다. 소재가 기능을 불러내는 것이다. 소재는 발견되고 기능은 발명된다. 소재가 기능에 앞선다. 마쓰시다가 플라스틱으로 가전제품을 만든 것은 소재의 혁명이다. 소재가 변하면 기능은 따라오므로 혁신이 우후죽순으로 일어난다. 사실이지 마쓰시다 혼자서 일본 열도를 먹여 살린 것이다. 기능경쟁이 일단락되면 성능경쟁이 일어나며 고성능 제품이 비싼 가격으로 시장에 군림한다. 시간이 흐르면 더 이상 좋은 성능이 필요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마트폰으로도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고성능 카메라가 왜 필요하냐는 식이다. 가성비를 따지는 효능경쟁이 일어나서 중저가 제품이 활개를 친다. 더 이상 바꿀게 없으면 외양의 디자인이라도 바꿔보는 것이다.
이 순서의 의미는 라디오모자와 같은 괴랄한 제품의 실패이유를 아는데 있다. 라디오와 모자를 결합하면 야구장에서 쓸만하지만 이런 식의 틈새시장을 노리는 제품은 의외로 실패하거나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저가제품인 모자의 기능을 높이려다가 고가제품인 라디오의 성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라디오의 기능이 모자의 외양보다 더 윗선이다. 고급모자가 아니라 저급한 라디오가 된다. 지게와 바퀴를 결합하여 300킬로도 짊어질 수 는 바퀴지게를 발명하여 후진국에 보급하려고 한 사람이 있지만 이런 식의 어중간한 제품은 실패한다. 아프리카를 지원하려는 적정기술이 대체로 기대에 못 미치는 이유다. 아프리카에 가장 필요한 것은 권력이다. 권력이 더 고가품이다. 차라리 권력을 과시할 수 있도록 비싼 제품을 파는게 낫다. 적정기술은 권력이 없는 처지를 들키게 한다. 아프리카에 필요한 것은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은 외부와 연결하는 권력을 준다. 우리는 실용적인 것을 주려고 하지만 실용적인 것은 별로 쓸모가 없다. 아프리카 사람이 적정기술을 갖고 오는 외부인을 반기는 것은 손에 쥐어주는 제품의 이득이 아니라 외부인과 연결되는 인맥의 힘을 반기는 것이다. 인맥이 권력이기 때문이다.
소재는 원리가 발견되고, 기능은 메커니즘이 발명되고, 성능은 한계점에의 도달이 경쟁되고, 효능은 가성비의 효율성이 착취되고, 외양은 고객의 기호에 맞춰진다. 소재, 기능, 성능, 효능, 외양의 순서대로 개발하면 흥하고 순서가 어긋나면 망한다. 고가품이지만 성능이 우월하여 다른 사람이 주목하게 만드는 권력을 주거나 저가품이라서 가성비가 좋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하는데 어중간하면 망한다.
입력 저장 제어 연산 출력
컴퓨터든 암산이든 주산이든 필산이든 원리는 같다. 손뼘으로 크기를 재더라도 같다. 입력, 저장, 제어, 연산, 출력은 구조론적 해석이며 컴퓨터 용어와는 다를 수 있으므로 적당한 우리말로 바꾸면 받기, 쌓기, 틀기, 풀기, 주기가 된다. 손뼘으로 잰다면 일단 가져와야 한다. 받기다. 다음 대상을 정렬해야 한다. 자리를 잡는 것이 쌓기다. 다음 손을 움직여서 접촉한다. 손뼘으로 재더라도 엄지가 먼저 닿는게 틀기, 다음 검지를 벌리는게 풀기다. 이렇게 얻어진 정보를 전달하는게 주기다.
컴퓨터라도 처음 입력은 서로 호환이 되어야 한다. 질은 결합하므로 결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음 입자는 독립하므로 재료를 도마 위에 올려야 한다. 그것이 저장이다. 일을 할 수 있도록 센터에 정렬하는 것이다. 다음은 컴퓨터가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는 것이 제어다. 칼로 도마를 내리치는 것이다. 그 다음은 그것을 반복한다. 무를 채썰더라도 반복하여 칼질을 하는게 연산이다. 프로그램이 작동하여 정보를 처리하는 것이 연산이다. 작업을 멈추는 것이 출력이다. 입력은 정보를 외부에서 가져오고 저장은 정보가 CPU에서 자리잡고, 제어는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고, 연산은 명령을 시간적으로 반복하여 실행하고, 출력은 그것을 모니터로 전달한다.
모든 일처리는 같다. 볼펜으로 글씨를 쓰더라도 일단 그것을 쥔다. 받기다. 다음 종이 위로 가져가서 적당한 위치에 센터를 맞춘다. 쌓기다. 다음은 힘을 가하는 것은 에너지의 방향을 트는 것이다. 다음 글씨쓰기를 반복적으로 진행한다. 뇌에 든 정보를 풀어내는 풀기다. 뇌 속의 정보가 종이에 주어지는 주기로 끝낸다. 모든 일은 외부에서 가져오고(질)(, 내부에서 정렬하고(입자), 명령을 전달하고(힘), 실무를 반복하고(운동), 끝나면 돌려준다(량).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헷갈릴 때 도움이 될 수 있다.
의사결정
세상은 사건이고 사건은 의사결정의 연결이다. 컴퓨터 회로처럼 갈림길에서 선택을 계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물질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건이 반복되는 것이다. 영화는 스크린에 비치고 세상은 시공간에 연출된다. 의사결정은 하나의 사건 안에서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5단계에 걸쳐 일어난다. 이 중에서 세 번째 힘이 결정이고 질과 입자는 사전에 세팅하고 운동과 량은 집행한다. 질은 에너지를 끌어오고, 입자는 코어에 핸들을 박고, 힘은 핸들을 틀어 공간의 방향을 결정하고, 운동은 시간의 순서를 진행하고, 량은 그것을 종결시킨다. 힘은 중심의 작은 위치에서 일어나고 운동이 그것을 전체에 전달하는 것이다. 사람이 빙판에 넘어진다면 중심이 넘어지는 것이다. 중심이 삐끗하는게 힘이고 그것이 전체에 전달되어 팔다리까지 신체가 전부 꽈당하는 것은 운동이다. 그 전에 중심을 도출하는 것이 입자, 그 전에 빙판과 맞서는게 질이다.
질은 외부에서 자원을 들여오고, 입자는 내부에서 정렬하고, 힘은 명령을 내리고, 운동은 반복하여 실행하고, 량은 종결하여 제출한다. 하나의 사건에서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5회에 걸친 세부적인 의사결정으로 닫힌계 내부의 에너지 모순을 처리한다. 외력을 그대로 되돌리거나, 내부에서 고루 분산하거나, 열과 빛과 파동으로 바꾸어 외부로 배출한다. 그렇게 못하면 깨진다.
상부구조 - 질, 입자 .. 무대의 세팅
의사결정.. 힘 .. 명령
하부구조.. 운동, 량 .. 명령의 실행
사건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의사결정은 힘의 명령이다. 질-입자-힘의 상부구조가 사전 준비작업이라면 힘-운동-량은 후속작업이다. 결정적인 작업은 힘에서 이루어진다. 사건 관련자가 법정에 모이는 것이 질, 판결을 내리는 주체가 입자, 법정에서 형량을 선고하는 것이 힘, 징역을 사는 것이 운동, 형기를 채우는 것이 량이다. 모래시계라면 가운데 잘록한 부분이 힘이다. 모래를 유리병에 가두는 것이 질, 중력으로 내리누르는 것이 입자, 모래가 구멍을 통과하는 것이 힘, 모래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운동, 모래가 바닥에 쌓이는 것이 량이다. 핵심적인 의사결정은 바늘과 같은 끝단에서 일어난다. 칼의 날과 같다. 숟가락이든 컵이든 물리적인 접촉점이 있다. 그 뾰족한 첨단부가 제품의 성능을 결정한다. 모래시계처럼 X자 모양으로 가운데가 잘록한 지점이 반드시 있다. 인간이 쓰는 도구는 질 - 입자 - 힘만 도구에 반영되고 나머지 힘- 운동 -량은 도구가 작업하는 대상에 존재하므로 도구의 날은 죄다 뾰족하다. 도구의 성능을 결정하는 접점이 있다.
질과 입자는 힘을 조직하고 운동과 량은 힘을 전달한다.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힘이다. 힘은 에너지의 방향을 바꾸어 속도를 끌어올린다. 사건은 닫힌계를 걸고 강체에 유체의 성격을 부여하여 힘을 한 곳에 몰아준다. 각운동량을 수렴하여 에너지를 쥐어짠다. 계 내부를 균일하게 만들어 천칭의 두 접시를 대칭시키고 축을 이동시켜서 두 날개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게 의사결정이다.
의사결정을 ( T )로 나타낼 수 있다. ( 괄호 )는 에너지의 입력과 출력이다. 질이 입력하고 량이 출혁한다. 가운데 T는 천칭저울 모양의 축과 대칭이다. 곧 밸런스다. 대칭된 수평의 접시 두개를 수직의 센터가 받치고 있다. 대저울의 짧은 팔에 계량하는 물체를 걸어 힘을 일으키고 반대쪽의 긴 팔로 추를 이동시켜 운동을 일으킨다. 힘은 운동과 거리의 곱이 된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내부에 ( T )를 숨기고 있다. 돌멩이라 해도 중력과 질량이 작용한다. 칼날의 날과 같고 볼펜의 촉과 같고 전축의 바늘과 같과 총의 뇌관을 때리는 공이와 같은 접점이 있다. 화살과 시위가 만나는 부분이 있다. 요凹와 철凸이 만나는 부분이다. 그 부분을 제어하여 운동과 거리의 곱과 힘을 교환한다. 돌멩이는 그것이 무게중심의 형태로 내부에 있지만 사람이 도구로 사용하면 외부로 나온다. 그 내부의 코어를 밖으로 꺼내는 것이 사건의 격발이다.
전략은 하부구조를 내부고 상부구조를 받는 것이다. 상부구조 1과 하부구조 2가 대칭된다. 등가로 교환되는 것이다. 에너지는 같은데 상부구조를 가진 쪽이 이긴다. 사용하는 비용이 덜 들기 때문이다. 상부구조는 1회의 의사결정으로 통제되나 하부구조는 2회의 의사결정이 필요하므로 의사결정비용에서 손해다. 이케아 가구는 조립비용을 소비자가 부담해야 하므로 같은 값으로 사면 손해다. 전략은 운동거리를 내주고 힘을 받는 것이다. 등가인데 힘이 이득이다. 단기전 2게임을 내주고 장기전 1게임을 받는다. 국지전 2게임을 내주고 전면전 1게임을 받는다. 같은 패턴으로 제한전을 내주고 총력전을 받으며, 전술적 승리를 내주고 내가 이기는 지점에서 싸우는 전략적 승리를 얻으면 이긴다. 명분과 실리의 교환이다. 당장의 이익과 나중의 권력을 교환한다. 노자의 실용을 내주고 공자의 합리를 얻어야 한다. 그 반대가 되면 주도권을 잃고 당한다. 등가인데 손해다. 5리터짜리 둘보다 10리터 짜리 하나가 운반비용이 싸다.
등가인데 의사결정비용에 차이가 난다. 주도권이 거기에 있다. 바둑을 두면 흑이 유리하고, 화투를 치면 선이 유리하고, 카지노를 가도 딜러가 유리하다. 주도권 비용만큼 유리함이 있는 것이다. 주도권을 만들면 이긴다. 계를 닫아걸고 강체를 유체로 만든 다음 수학을 믿고 확률을 높이는 순방향으로 기동하며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반복하고 장기전을 수행하면 승리한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피하려고 합리적인 의사결정보다는 행운의 한 방을 노린다. 의사결정을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미 가치
사건을 다음 단계로 연결하는 것이 의미다. 인간은 쾌락이나 보상을 추구하는 동물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이다. 견주는 보상을 주는 방법으로 강아지를 훈련시키지만 이는 강아지가 훈련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쓰는 궁여지책이고 강아지가 의미를 깨달으면 보상을 주지 않아도 열심히 한다. 천재견이 그러하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야망, 의도, 목적, 동기, 쾌락, 탐욕, 욕망 따위는 개소리고 인간은 의미를 추구한다.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온갖 말이 다 나오는 것이다.
의미는 사건을 다음 단계로 연결한다. 소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고 했다. 국가도 주변국들 중에서 만만한 배후지를 보고 전략을 세운다. 강국을 등지고 약소국을 바라본다. 길은 막다른 길보다 연결된 길이 좋다. 사건이 연결되어 의미를 달성했을 때 인간은 전율한다. 도박판에서 돈을 따면 전율한다. 다음 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돈을 땄다는 사실보다 다음 사건과 연결된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연결될 때 전율한다. 첫 키스의 추억처럼 강렬하다. 다음 데이트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호르몬이 쏟아지고 에너지가 분출한다. 설레이고 흥분하고 기분이 업된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사건의 연결에 따른 의미, 의미의 포착에 따른 전율, 전율에 중독된 데 따른 열정, 열정을 드러내는 매력이다. 의미를 보지 못하면 시큰둥하다. 포기하게 된다. 동기나 보상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거나 증명하려는 것이며 이는 열등의식을 들키는 행동이다. 주체적인 판단이 아니다. 어른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어린이의 행동이다.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점에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의 행동이다.
인간의 행위하는 목적은 자연의 큰 흐름에 올라타고 눈앞의 이득과 나중의 권력 사이에서 바꿔치기를 계속하여 사건을 부단히 다음 게임으로 연결시켜 가는 것이다. 이때 바꿔치기 할 눈앞의 이득과 장래의 주도권 사이에 가중치를 판단하는게 가치다. 의미는 연결하고 가치는 선택한다. 의미가 사건의 연결이라면 가치는 갈림길에서의 선택이다. 단기전보다 장기전, 전술보다 전략, 실용보다 합리, 결과보다 원인, 단절보다 연결, 부분보다 전체가 가치가 있다. 주변과 연결되는 촉수가 많은 쪽을 선택해야 한다. 서로 공유하는 부분을 차지해야 한다. 모든 사건은 거기서 격발되기 때문이다.
전략 전술
전투는 전장 안에서 벌어지지만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전장 바깥의 요인을 움직여서 적이 최종적으로 패배를 납득하고 결과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완벽한 승리를 끌어내는 것이 전략이라면, 전장 안에서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것은 전술이다. 전략은 외부를 연결하여 절대적인 힘의 우위를 만들어내고, 전술은 내부를 단절하여 상대적인 힘의 균형을 만들어낸다. 전략이 전술에 앞선다. 전략으로 큰 그림을 그리고 전술로 세부를 확정한다. 전략이 전술보다 커버하는 범위가 크다. 많은 숫자와 강한 힘으로 이길 싸움을 이기는 것은 전략이고, 적은 숫자와 약한 힘으로 질 싸움을 지지 않는 것은 전술이다.
사람들이 전략보다 전술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이론적 확신의 부족 때문이다. 장기전을 수행하며 끝까지 전략을 밀어붙일 배짱과 용기가 없고, 큰 그림을 그릴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작은 전투를 내주고 큰 연결을 차지해야 하는데 작은 전투를 지면 군대의 사기가 떨어지고 왕에게 지휘권을 빼앗기는 수가 있다. 이 문제는 충분한 훈련과 정비된 시스템으로 해결해야 한다. 전략은 눈에 보이는 작은 실리를 희생하고 대신으로 보이지 않는 큰 연결을 얻은 다음 자신이 가진 전력을 몽땅 쏟아부어 최후의 일전으로 이기는 것이다. 외부 변수를 줄여서 피아간에 팽팽한 밸런스를 유도하고 저울의 축을 만든 다음 그 축을 선점하고 그 축의 이동에 따른 기세의 힘으로 밀어붙인다. 요행수를 기대할 수 있는 외부의 변수가 사라졌으므로 적은 결과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상부구조에서의 질-입자-힘이 전략이라면 하부구조의 힘-운동-량이 전술이다. 전략 안에서 전술을 구사하면 흥하고 전략 없이 전술만 구사하면 전투에 이기고 전쟁에 진다.
일원론
구조론은 일원론이다. 사물은 둘이지만 사건은 하나다. 결과는 여럿이지만 원인은 하나다. 과녁은 여럿이지만 활은 하나다. 일방작용으로 보면 여럿이지만 상호작용으로 보면 하나다. 배는 이물과 고물이 있지만 키는 하나고, 자동차는 전진과 후진이 있지만 핸들은 하나고, 전기는 ON과 OFF가 있지만 스위치는 하나다. 인간이 사건에 개입하는 방식은 대칭의 둘이다. YES 아니면 NO다. ON 아니면 OFF다. 삶 아니면 죽음이다. 성공 아니면 실패다. 그 개입의 결과는 여럿이다. 하나의 자동차를 두고 인간이 타거나 타지 않거나 두 가지를 판단하며 그 자동차로 갈 수 있는 행선지는 여럿이다. 일원론이냐, 이원론이냐, 다원론이냐 하는 논쟁은 사건의 진행절차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 따른 착오다. 사건은 언제나 하나이고, 사건에 대한 인간의 입장은 언제나 둘이며, 결과로 얻어지는 사물은 여럿이다. 각자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이다. 관점의 혼선이다. 일방작용이 아니라 상호작용으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일원론 - 하나의 사건
이원론 - 인간의 두 가지 개입방법
다원론 - 다양한 사건의 결과
시작은 하나요 과정은 둘이요 결과는 여럿이다. 일원론, 이차식, 다양형이라고 해야 한다. 각각 으뜸, 버금, 딸림이다. 여럿은 반드시 둘로 좁혀지고, 둘은 반드시 하나의 근본으로 돌아간다. 근본이 되는 하나의 벼리를 찾지 못하였다면 사유를 충분히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이 다원론을 좋아하는 것은 사건의 결과측에 개입하려는 비겁한 잔꾀 때문이다. 제사가 끝나고 음복할 때 나타나서 다양한 음식을 얻어먹으려는 것이다. 그 제사의 주최측은 일원론으로 진행하는데 말이다. 종교의 승려나 학교의 교사나 사회의 엘리트가 이원론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을 제압하고 통제할 의도 때문이다. 인간들이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 않기 때문에 YES냐 NO냐 하고 윽박질러 선택을 강요한다. 말 안듣는 녀석을 내쫓으려면 안과 밖의 경계를 그어서 이원론을 구사해야 한다. 다원론은 약자의 살아남으려는 처세술이고, 이원론은 강자의 사람을 제압하는 기술이다. 그들은 애초에 진리와 상관없는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은 일원론이다. 사건을 일으키는 에너지의 공급라인에 잡혀 있기 때문이다. 통제해야 하는 에너지원이 하나이므로 사건이 하나인 것이다.
일의성
주사위를 한 번 던져서 눈을 결정하는 것이 일의성이다. 우리는 인과율을 배워서 뭐든 둘로 나누려고 하는 습관이 있다. 사실은 치고 받는 둘이 아니고 랠리가 이어지는 하나다. 연결을 보면 1인데 단절을 보므로 2로 착각된다. 찍는 도장과 찍히는 무늬는 한 번에 결정된다. 찍고 난 다음에 찍히는게 아니고 찍는 동시에 찍힌다. 실제로는 시간차가 없다. 시간차는 사건이 증폭되어 외부로 전달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는 동시에 성립하지만 교통위반 범칙금이 날아오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떡잎이 자라서 펼쳐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씨앗을 조사해보면 배아에 이미 잎이 숨어 있다. 없던 떡잎이 자라난게 아니고 숨어있던 떡잎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인과의 법칙에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착각이다. 동시에 결정되고 시간이 지난 후에 확인된다. 원인 다음에 결과가 오는게 아니고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성립하지만 원인 다음에 결과가 확인된다. 원인은 전체에 해당되고 결과는 부분에 나타나기 때문에 원인은 미리 찍어도 되고 결과는 나중의 발표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입시에 붙었든 떨어졌든 원인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합격이라도 공부탓, 불합격이라도 공부탓이다. 그러므로 원인은 미리 찍어도 된다. 결과는 발표를 보고 말해야 한다.
전후, 좌우, 상하, 경중, 내외, 대소 등의 둘씩 짝지어져 대칭되는 개념들은 모두 둘을 통일하는 하나의 토대가 있다. 전후에는 시간적 순서가 있고, 좌우에는 공간적 방향이 있고, 상하는 단계가 있고, 경중은 무게가 있고, 내외는 경계가 있고, 대소는 크기가 있다. 사물은 둘이지만 사건은 하나다. 세상은 접혀 있는 것이 펼쳐지듯이 일의적으로 일어난다. 단번에 결정된다. 낙하산이 펼쳐지듯이 확 펴진다. 그러므로 말단부에서 용을 써봤자 헛일이다. 상부구조에서 잘하고 앞선단계에서 잘해야 한다. 결과측이 아니라 원인측에서 잘해야 한다. 목줄을 쥔 사람이 잘 컨트롤 해야 한다.
언어, 담론, 전제 진술
언어는 사건을 반영한다. 짧은 외마디 비명소리라도 그 안에는 사건이 반영되어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갖추어 있다. 아기가 꺅! 하고 소리를 질러도 그게 갖추어진 문장이다. 많은 부분이 숨겨지고 생략된다. 그 숨겨지고 생략된 것을 보충하여 갖추어진 완전체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담론이다. 담론은 조건문과 반복문의 호응으로 이루어진다. 낯선 사람에게 갑자기 말을 걸면 이상하고 왜 내가 당신에게 말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조건문이다. 말을 하려면 일단 상대방을 테이블에 앉게 만들어야 한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어야 한다. 한국사람들은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서 뭔가 일치하는게 찾아지면 그것을 빌미로 말을 건다. 영국인들은 초면에 정치이야기나 종교이야기를 하면 실례가 되므로 두 시간 동안 날씨 이야기만 하다가 헤어진다. 반복문은 조건문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부름과 응답, 질문과 대답, 조건문과 반복문의 호응이다. 한시로 말하면 댓구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말대꾸를 하는 것이 언어다. 소설이나 칼럼처럼 혼자 일방적으로 말할 때는 자문자답을 해야 한다. 자문이 조건문이면 자답이 반복문이다. 명제는 전제와 진술이 호응되어야 한다. 담론이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거는데 따른 갖추어진 형식이라면 명제는 일방적 선언에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갖추어진 형식이다. 먼저 전제를 깔아서 상대를 부르고 진술을 쳐서 답해야 한다. 전제로 호출하고 진술로 호응하는 것이다. 전제는 판단조건을 제공하고 진술은 판단내용을 전달한다. 진술 안에서 다시 주어와 목적어의 대칭, 동사와 동사의 대칭, 화자와 청자의 대칭이 숨어 있다.
말을 하는 것은 활을 쏘는 것과 같다. 담론은 궁수가 활을 잡고, 명제는 활에 화살을 매긴다. 주어의 활로 동사의 화살을 목적어의 과녁에 쏠까요?
존재론 인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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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은 자연의 모습이 뇌 안의 스크린에 비치는 것이다. 그런데 거울의 상이 바뀌듯이 왜곡된다. 이를 바로잡는 것이 존재론이다. 그냥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은 인식론이다. 거울에 비친 상은 다 맞는데 딱 한 부분이 안 맞다. 그 부분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쓸만하다. 일상생활은 인식론적 사유로 해도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중요한 부분은 지도자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고 사소한 부분은 잘못될 일이 없다. 잘못되면 지도자 탓을 하면 된다. 이게 다 히틀러 때문이다. 내 잘못이 아냐. 그런데 과학자나 지도자라면 그런 식으로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 제대로 해야 한다. 잘난 정치인들이 일반인들보다 못한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이유가 있다.
존재론은 자연의 있는 그대로를 보는 관측법이다. 그냥 볼 수 없고 특별한 도구를 써야 한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그런데 존재론에 도달하려면 일단 인식론이라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인식론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존재론의 정상을 밟은 다음에는 인식론을 버려야 한다. 일단은 거울을 사용하되 한 번 뒤집어야 한다. 우리는 거울을 보고 빗질을 하고 면도를 할 수 있다. 숙달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처음에는 안 된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뇌가 학습해서 되는 것이다. 자동차의 백미러를 보고 후진을 할 수 있지만 그것도 숙달된 덕분이다. 처음 한 번은 반드시 실수를 한다. 존재론은 간단하다. 인식론을 뒤집으면 존재론이다.
무지개를 봤다면 등 뒤에 태양이 있다. 인간은 곧바로 태양을 볼 수 없고 무지개를 본 다음 추론하여 태양을 찾아야 한다. 태양을 찾은 다음에는 무지개를 잊어버려야 한다. 그림자와 같다. 범인의 그림자를 보고 범인을 추적하지만 범인을 잡은 다음에는 그림자를 버려야 한다. 그림자에 수갑을 채워 경찰서로 끌고가려고 하는게 인식론의 실패다.
자연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고 인간은 부분에서 전체로 간다. 자연은 원인에서 결과로 가고 인간은 결과에서 원인으로 간다. 자연은 연결에서 단절로 가고 인간은 단절에서 연결로 간다. 자연은 연역하고 인간은 귀납한다. 화살은 활에서 과녁으로 간다. 인간은 과녁에 꽂힌 화살을 보고 추론하여 활을 찾아낸다. 이 방법으로는 올바른 인식이 불가능하다. 방향이 틀렸다. 부분에서 전체를 찾을 수 없다. 결과에서 원인을 되짚을 수 없다. 단절에서 연결로 복구할 수 없다.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아기는 단어를 먼저 배우고 문장을 나중 배운다. 문장을 먼저 배우고 빈 칸에 단어를 채워넣는게 존재론이다.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인식론으로 시작하지만 적절한 시점에 존재론으로 갈아타야 한다. 갈아탄 다음에는 인식론을 버려야 한다. 존재론은 무한복제가 가능하므로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 인식론의 부스러기 지식은 버려도 상관없다.
존재론의 연역은 복제한다. : 배경 -> 실체 -> 연관 -> 이행 -> 귀결
인식론의 귀납은 추측한다. : 지각 -> 수용 -> 분석 -> 종합 -> 응용
존재론은 확실한 지식이지만 복제의 원형이 필요하고, 인식론은 엉터리지만 선택지가 많지 않을 때 넘겨짚기로 빠르게 판단할 수 있다. 존재론은 올바른 지식의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인식론은 사소한 일에 써먹을 수 있으나 깊이 들어가면 거의 가짜다. 각종 음모론에 괴력난신, 초능력, 텔레파시, UFO, 천국, 귀신 따위는 인식론의 귀납에 따른 오류다. 자유, 평등, 정의, 평화, 행복, 사랑과 같은 관념어나 욕망, 의지, 의도, 목적, 탐욕, 야망 따위는 심리학적 접근이나 각종 선입견, 편견, 차별주의, 고정관념이 모두 인식론의 귀납에 따른 오류다. 택도 없는 헛소리다. 세상에 개소리가 너무 많다.
인간의 지적 활동은 뇌의 스크린에 자연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에서 촉발된다. 그림자를 곧 지식으로 간주하면 인식론의 오류다. 그림자를 단서로 삼아 자연의 진상이 인간의 뇌에 비치는 과정을 재현해야 한다. 모든 지식은 인식론의 추측과 넘겨짚기로 출발하되 그것은 잠정적인 지식으로 간주하고 존재론의 실험과 재현으로 검증해야 한다.
연역 귀납
존재론은 연역추론이고 인식론은 귀납추론이다. 연역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고 원인에서 결과로가고 연결에서 단절로 간다. 귀납은 부분에서 전체로 가고 결과에서 원인으로 가고 단절에서 연결로 간다. 연역이 올바른 추론이지만 많은 경우 연역이 불가능하다. 단서가 없으므로 추론을 시작할 수 없다. 인간이 사건을 목격했을 때는 범인이 현장을 이탈하고 난 다음이기 때문이다. 일단 귀납으로 단서를 찾은 다음 연역으로 재구성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현장검증이 그러하다.
연역 - 공유에서 다름을 추적한다.
귀납 - 다름에서 공유를 추적한다.
연역은 범인과 피해자가 공유하는 것을 먼저 찾고 그 다음에 다름을 변별한다. 치정사건인지, 재산다툼인지, 원한관계인지, 우발적 사건인지 범죄유형을 특정하는게 연역이다. 범죄의 패턴을 알고 들어가는 것이다. 치정이면 애정을 공유하고, 재산이면 돈을 공유하고, 원한이면 과거의 기억을 공유하고, 우발적인 범죄라면 공간을 공유한다. 반드시 공유하는 것이 있다. 공유하는 것을 추려내는게 연역이다. 귀납은 다름을 먼저 변별한다.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일반적인 경우와 다르므로 현장에서 단서를 확보할 수 있다. 피가 떨어져 있거나 유리창이 깨져 있다면 평범함과 다른 거다.
많은 경우 선택지가 별로 없다. 한 사람이 있는 공간에서 범죄가 일어났다면 그 한 사람이 범인이다. 귀납은 운이 좋으면 1초만에 범인을 특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한 번 잘못되면 영원히 범인을 놓친다.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 단정했다가 현장을 훼손해서 증거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연역은 가능성을 받아들여 그물을 치듯 모든 넓게 잡았다가 조금씩 좁혀서 확실하게 사건을 해결하지만 일정부분 귀납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쉬운 사건은 귀납하고 어려운 사건은 연역해야 한다.
추론은 연결을 따라가는 것이다. 한강 의대생 사건의 경우 한강이라는 지형을 통해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물 속에 발이 빠지는 뻘밭이 있었다. 문제는 인간의 태도다. 보통은 다름에 주의가 간다. 친구와 사이가 틀어졌다거나 뭔가 다른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경우는 범인이 금방 잡힌다. 며칠이 지났는데 범인을 못 잡았다면 다름이 아닌 같음을 조사해야 한다. 살인의 순간 범인과 피해자는 찌르고 찔리며 흉기를 공유한다. 범인과 피해자는 장소와 시간과 물리적 수단 셋을 반드시 공유한다. 반드시 공유하는게 있고 그게 원인이다.
질은 범인, 입자는 흉기, 힘은 장소, 운동은 범행시간, 량은 범죄 피해자다. 범인과 피해자는 이 다섯가지를 무조건 공유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들어가는게 연역이다.
연역은 수학이다. 하나의 지식을 알아낸 다음 이를 대량으로 복제한다. 귀납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연역의 집합이다. 뇌 안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르는게 연역이다. 인간의 뇌구조가 패턴을 복제하는 연역구조이기 때문이다. 패턴을 복제하도록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귀납이다. 귀납은 학습에 쓰인다. 연애를 책으로 배웠다거나 핸들 한 번 잡아보지 않고 운전할줄 안다고 믿는게 귀납의 오류다. 자전거를 배우되 먼저 균형을 잡고 페달을 밟아 전진한다거나, 수영을 배우되 먼저 물에 뜨고 헤엄친다거나, 비행기를 날리되 먼저 공중에 뜨고 그 다음에 비행한다는게 귀납의 오류다. 실제로는 항상 전체가 먼저다. 헤엄을 쳐야 물에 뜨고, 페달을 밟아서 전진해야 균형이 잡히고, 비행기가 날아야 공중에 뜬다. 인간은 언제나 귀납의 덫에 걸리므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을 절차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원인 경과 결과
사건은 기승전결로 흘러가는데 우리는 원인과 결과 두 단어로 설명한다. 터무니없는 일이다. 연역과 귀납, 존재론과 인식론의 방향성을 헷갈리지 않으려면 원인과 결과 사이에 경과를 넣어야 한다. 사건의 중심은 의사결정이다. 사건은 원인에서 의사결정이라는 경과를 거쳐 결과로 간다. 원인>경과>결과다. 원인과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문제는 대칭의 상대성이다. 우리는 상하, 좌우, 강약, 경중, 전후와 같은 대칭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그런데 사물은 대칭이지만 사건은 비대칭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통제하려고 개입하는 순간 대칭성은 사라지고 비대칭성이 드러난다. 자동차는 앞뒤가 대칭이지만 시동을 걸면 앞으로 간다. 빛은 입자가 있어도 어둠은 입자가 없다. 사물로 보면 빛과 어둠이 대칭이지만 사건으로 보면 언제나 빛이 어둠을 조절할 뿐 어둠은 빛을 조절할 수 없다.
악의를 가지고 뭐든 대칭의 상대성으로 몰아서 물타기 하려는 사람이 있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그 놈이 그 놈이라거나, 강자나 약자나 둘 다 잘못했다거나. 재벌이나 노동자나 똑같다거나 이런 식의 결론이 없는 허무주의로 유도하는 속임수 말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경과를 집어넣으면 엔트로피의 일방향성이 드러나므로 상대성으로 속일 수 없다. 사건은 언제나 위치에너지에서 운동에너지로 가고, 원인에서 결과로 가고, 연결에서 단절로 가고,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지 그 역은 없다. 사건은 화살처럼 똑바로 날아간다. 모든 사건은 A에서 B로 일직선으로 날아가며 양자가 공유하는 토대 C가 있다. C가 A와 B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므로 역방향 진행은 자연에 없다. 열린계에서 혹은 국소적으로는 역방향으로 가는 백래시가 있을 수 있다. 자동차는 앞으로 가지만 배기가스는 뒤로 간다. 그런데 떨어져 나간다. 배기가스가 뒤로 갔다고 해서 자동차가 뒤로 간 것은 아니다.
역설 이중의역설
사물은 인간이 다루는 대로 움직이지만 사건은 계에 에너지가 걸려 있으므로 대칭의 축에 걸려서 의도와 반대로 된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이기려고 하면 지고 지려고 하면 이긴다. 강체는 의도대로 되고 유체는 반대로 된다. 정치인 한 명은 강체이므로 포섭하면 의도대로 되지만 국민은 유체이므로 정치인이 공작을 하면 반대로 된다. 일방작용은 원하는대로 되고 상호작용은 반대로 된다. 반대로 되는게 역설이다.
두 사람이 한 배를 타고 있다. 이물에 앉아서 고물에 있는 사람을 쓰러뜨리려면 반대로 움직여야 한다. 상대를 넘어뜨리려다가 내가 자빠지는게 역설이다. 저울의 축이 움직이기 대문이다. 축을 장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축을 장악하려면 외부에서 들어와야 하며 닫힌계 안에서는 엔트로피 때문에 불가능하다. 왼쪽을 해결하려면 오른쪽을 먼저 조치해야 한다. 사냥감을 몰이하려면 산을 한 바퀴 돌아서 반대쪽으로 기동해야 한다.
이중의 역설은 축을 장악한 다음에는 다시 그 반대로 되는 것이다. 축을 장악하지 못하면 량은 운동에 걸려서, 운동은 힘에 걸려서, 힘은 입자에 걸려서, 입자는 질에 걸려서 의도와 반대로 된다. 숨은 플러스 알파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기세와 이윤과 권력과 관성과 효율이 작업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반대쪽에 먼저 조치해야 한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줘야 한다. 그런데 때로는 반대로 조치해도 실패한다. 그럴 때는 오히려 정면승부로 밀어붙여야 한다. 축을 선점하고 세게 밀어야 한다.
질 입자 힘의 상부구조와 힘 운동량의 하부구조가 있다. 하부구조를 잘해봤자 상부구조에서 틀어버리는게 역설이다. 하부구조는 역설이 작용하므로 항상 반대쪽에 먼저 조치하고 기동해야 한다. 적의 배후에 일대를 보내서 퇴로를 끊어놓고 작전에 들어가야 한다. 상부구조는 그런거 없고 그냥 불도저로 밀어야 한다. 축을 장악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액션은 반대가 된다.
정치인이 상대편의 실수를 추궁하여 이득을 보는게 역설이다. 박근혜의 삽질에 문재인이 이득을 봤다. 반면 안철수처럼 상대편의 실수만 기다리다가 주도권을 잃어버리는게 이중의 역설이다. 힘이 없으면 상대의 실수를 기다려야 하고 내가 힘을 가졌다면 화끈하게 밀어야 한다. 어떤 핵심을 거머쥔 다음에는 복잡한 속임수를 버리고 단순한 방법을 써야 한다. 그럴 때는 힘으로 찍어누르는 정공법이 최고의 전술이다.
세상은 상호작용이니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작은 게임은 역설이 작용하고 큰 게임은 이중의 역설이 작용한다. 역설은 상대편의 실수를 응징해서 이기고, 이중의 역설은 그 과정에 국민이 똑똑해져서 이긴다. 역설은 불의가 꼼수로 이기고 이중의 역설은 주최측이 룰을 개정해서 정의가 이긴다. 보트의 노는 반대쪽으로 움직이므로 역설이다. 배가 앞으로 가게 하려면 노를 뒤로 밀어야 한다. 범선의 키는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든 무조건 배를 전진시키는 이중의 역설이다. 키가 찾아야 할 주도권이다. 기세요, 이윤이요, 권력이요, 관성력이요, 효율성이다. 키가 없으면 가려는 방향과 반대로 움직여서 키를 장악하고 키를 장악한 다음에는 좌고우면 하지 말고 정공법으로 몰아붙여야 한다.
모순
사건은 균일한 계에서 일어난다. 사건을 촉발하는 계 내부의 불균일이 모순이다. 계는 외력의 작용에 맞서 1로 대응하여 반작용으로 되돌린다. 외력이 작용할 때 불균일로 인해 계가 1이 아니게 되면 깨진다. 에너지가 계 내부를 돌아다니다가 불균일한 지점에 수렴되며 그 지점이 조직의 약한 고리가 된다. 조직은 약한 고리를 보완하는 과정에서 발전한다.
외력은 계 내부에서 균일하게 분산되거나, 반작용의 형태로 돌려보내거나, 열과 진동의 형태로 다시 외부로 빠져나간다. 그 모순의 해소과정이 사건이다. 우주의 많은 존재가 자전과 공전의 형태로 회전하는 이유는 회전이 계를 균일하게 만드는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외력을 받은 존재는 외력을 쳐내거나 깨지거나 돌거나 동그랗게 된다. 불균일한 계는 소행성의 파편처럼 깨진다. 과일이 둥근 형태를 가지는 것도 같다. 둥글지 않으면 짜부러져서 깨진다.
투수의 공과 타자의 배트가 부딪혔는데 타자의 배트가 부러졌다면 배트 내부가 균일하지 않은 것이다. 에너지는 계 내부를 돌아다니다가 유체의 몰아주는 성질에 의하여 불균일한 한 지점에 수렴되므로 그 지점에서 깨진다. 그 지점이 조직의 약한 고리다. 조직은 약한 고리를 보완하는 과정에 진보하므로 모순이야 말로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계 내부를 효율적으로 재배치하여 모순을 제거하고 합리화 하는 방향으로 사회의 진보는 일어난다.
집단이 발전하려면 내부가 균일해야 하지만 동시에 일부 모순이 있어서 에너지 낙차를 일으켜야 한다. 글자가 어려워야 엘리트와 비엘리트가 나눠지고 비엘리트가 엘리트에 복종한다. 봉건주의가 사용하는 이 방법은 일시적 성과를 내지만 곧 한계에 봉착한다. 엘리트와 비엘리트 간에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사병이 간부를 주적으로 치는 것이 그러하다. 더 진보하려면 쉬운 문자가 보급되고 미디어가 발달해서 엘리트와 비엘리트의 간극을 없애야 한다. 그 과정에서 모순이 진보의 속도를 조절한다. 완전히 균일하면 변화가 너무 빨리 일어나고 너무 빨리 멈춘다. 진화가 너무 빨리 일어나고 너무 빨리 멈춘다.
사회가 진보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모순을 찾아내야 한다. 근래의 탈근대나, 똘레랑스나, 페미니즘이나, 정치적 올바름은 그렇게 찾아진 모순이다. 다문화니 성소수자니 하며 의도적으로 들쑤셔서 사회의 숨은 모순을 찾아내고 이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사회는 전진한다. 검찰개혁, 언론개혁, 관료개혁도 마찬가지다. 잠복한 갈등을 드러내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문제해결능력의 발달 형태로 사회는 진보한다. 옳으냐 그르냐는 중요하지 않다. 경험치가 중요하다. 문제해결능력이 중요하다. 옳지 않은 사회는 살아도 문제해결능력이 없는 사회는 죽는다. 미국이 온갖 모순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이유다.
모순이 없으면 사회는 정지하고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면 사회는 파괴된다. 모순이 구조 내부에 에너지를 수렴하는 코어를 이루고 조직의 약점인 코어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사회가 진보한다. 코어가 너무 강해도 또다른 불균일의 원인이 되므로 민주주의는 선거로 코어를 교체한다. 대통령에게 권력을 줘서 코어를 강화시키는 동시에 선거를 통해 제압하여 힘을 빼는 것이다.
상호작용 일방작용, 게임
의사결정은 축 1과 대칭된 2가 맞물려 구조를 이룬 상태에서 일어난다. 이때 대칭을 이루고 맞물려 돌아가는 2를 나누어 별도로 관측하면 일방작용이고 둘을 합쳐서 하나의 호흡으로 보면 상호작용이다. 숨을 내뿜는 호와 들이마시는 흡은 둘이지만 생명의 호흡은 하나다. 선수가 공을 때리는 것은 일방작용이고 공격과 수비 사이에 랠리가 이어지는 것은 상호작용이다.
물레방아는 물레부와 방아부로 나눌 수 있다. 이를 별도의 두 존재로 보면 일방작용이고 하나의 물레방아로 보면 상호작용이다. 선수의 시선과 주최측의 시선이 있다. 선수가 보는 일방작용의 관점으로 보면 두 팀의 대결이다. 주최측이 보는 상호작용의 관점으로 보면 하나의 시합이다. 이어지는 랠리로 보면 하나의 축이 대칭 2를 끌고 간다. N극과 S극으로 두 개의 극이 있는게 아니라 하나의 자기력선이 있다. N에서 S로 갈 뿐 그 반대는 없다. 빛이 어둠을 통제할 뿐 그 반대는 없다.
A가 움직이면 B가 움직이고 B가 움직이면 A가 움직인다. 움직이는 둘이 연결되면 하나의 메커니즘을 이루고 거기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하나의 토대에 꿰어지면 시스템이다.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바퀴는 둘이지만 공급되는 에너지원은 하나다. 두 바퀴를 각각 관찰하면 일방작용이고 하나의 에너지원으로 보면 상호작용이다. 이를 게임에 비유할 수 있다. 게임은 주최측이 있다. 주최측은 공정하지 않다. 더 많은 관객을 끌어모아 게임을 흥행시키는 한 방향으로 룰을 적용한다. 주최측은 기계적인 공정이 아니라 흥행이 되는 공정을 추구한다. 심판은 랠리가 이어지게 하는 쪽에 승리를 선언한다. 랠리가 권력을 가진다. 진화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전진한다. 인류문명 역시 상호작용의 총량증대라는 한 방향으로 전진한다.
관측 해석, 주체 객체 관측은 관측자와 관측대상이 대칭을 이룬다. 이때 판단기준이 되는 가늠자가 있다. 관측자 자신이 판단기준이 되는게 관측의 오류다. 가늠자는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데 관측자가 움직이므로 노이즈가 발생한다. 관측대상이 움직여도 노이즈가 발생한다. 보통은 관측자와 관측대상이 둘 다 정지해 있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고정된 관측자가 고정된 사물을 관측해야 올바르다. 그런데 실제로는 관측자인 주체도 움직이고 관측대상인 객체도 움직여서 노이즈를 일으키므로 해석이 필요하다. 관측의 노이즈를 제거하는 해석도구가 구조론이다.
강체는 해석이 필요없다. 사물은 해석이 필요없다. 둘 이상의 복수가 움직이면 유체가 된다. 유체는 해석되어야 한다. 사건은 해석되어야 한다. 해석은 관측의 주체와 객체를 고정시키는 것이다. 돌아다니는 것을 고정시킬 수 없으므로 대신 나란한 것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대칭이다. 객체 내부에서 나란히 가는 것을 찾으면 된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관측은 정지해 있는 객체의 외부를 조사할 때만 유효하다. 해석을 거치지 않으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만 관측할 수 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된다. 죽은 것을 관측하되 산것을 관측하지 못하고, 사물을 관측하되 사건을 관측하지 못하고, 정지한 것을 관측하되 움직이는 것을 관측하지 못하고, 표면을 관측하되 내부를 관측하지 못하고, 결과를 관측하되 원인을 관측하지 못한다. 사건과, 움직이는 것과, 산 것과, 내부와, 원인과, 유체를 관측하려면 구조론이라는 특별한 해석 도구를 써서 노이즈를 제거하고 데이터를 보정해야 한다.
구조론은 수학을 쓴다. 수학은 둘 이상이 집합을 이루고 서로 연동된다. 구조론은 복수의 사물을 서로 연동시켜서 사건화 하는 방법을 쓴다. 이때 객체 내부의 A와 B는 대칭을 이루고 나란하므로 A가 변해도 B가 따라붙는다. 상대성을 절대성으로 바꾸고, 일방작용을 상호작용으로 바꾸면 노이즈가 제거되므로 객관적인 관측이 가능하다. 관측대상 안에서 대칭된 A가 움직였을 때 B가 어떻게 맞서는지를 보는 것이다. 관측자의 개입을 배제하고 객체 내부에서 자체의 대칭을 추적하기다. 사물은 사건으로, 강체는 유체로, 실체는 관계로 바꾸어 관측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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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 소집, 사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런데 사회의 존재는 불분명하다. 사회학은 동물적 본능과 집단적 무의식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 막연히 사회가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소설 쓰는 것이다. 사회는 존재하는게 아니라 권력에 의해 집단적 의사결정에 동원되는 것이다. 그냥 모여있는 것은 군집이지 사회가 아니다. 자원들이 직간접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려면 권력이 있어야 한다. 권력을 만드는 절차가 동원이다.
가족은 선천적으로 동원된다. 가장의 권력은 원시사회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부족민은 12살이 되면 아이를 버린다. 일본인과 유태인은 13살이 되면 아이를 내보내는 관습이 있었다. 게르만족도 15살이 되면 자녀를 독립시킨다. 신라의 화랑도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부족민이 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해도 국가는 있다. 동원구조가 존재하면 국가다. 전쟁에 동원되면 국가다. 광장에 동원되면 사회다. 노동에 동원되면 회사다. 생식에 동원되면 가족이다. 취미로 동원되면 동아리다.
동원은 권력을 만들고 소집은 권력을 행사한다. 사회는 동원되어 있다고 간주한다. 오일장은 오일마다 소집된다. 새벽장은 새벽에 만짝 하고 파장한다. 시장이 상설화 되듯이 동원이 상설화 되면 사회가 된다. 원래는 전쟁이 일어날때 사람을 동원하는데 전쟁이 반복되면 군대가 상비군이 된다. 유목민은 여름에 목축에 종사하다가 겨울만 되면 전쟁에 동원된다. 징기스칸 때는 일년 내내 전쟁을 하게 되는게 상비군이 된 것이다.
의리
의리는 집단이 동원에 앞서 권력을 생성하는 근거다. 사회의 근거는 권력, 권력의 근거는 동원, 동원의 근거는 의리다. 의리는 공적 자산의 공유다. 집단이 위협을 받을 때 대응하려면 집단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해야 한다. 권력이 있어야 한다. 권력은 개인으로부터 위임된 것이다. 권력을 집단에 위임하는 절차가 동원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담할 것인가?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내가 앞장설 것인가? 외국인이라면 언어를 몰라서 가담할 수 없다. 무언가 공유하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집단의 공적 자산을 공유하는 방법으로 벌어진 사건에 가담할 수 있는 상태가 의리다.
로크, 홉즈, 룻소 등의 사회계약설은 개소리고 인간은 계약한 적이 없다. 오랑우탄과 침팬치와 보노보와 고릴라와 긴팔원숭이는 의리가 없으므로 아직 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공유하는 것이 없으면 의리가 없다. 의리가 있는 집단이 나무에서 살살 내려와서 온갖 위험이 가득한 들판을 뛰어다니면서도 의사결정을 잘해서 살아남았다. 미친 사람이 지하철에 불을 지르면 누가 그것을 막아야 한다. 그런데 양반이라는 이유로 혹은 귀족이라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방관하면 죽는다. 그 불을 끌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낸 집단이 살아남았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은 의리가 부족했다. 그들은 집단의 위기에 맞서지 못했다. 권력을 생성하지 못했다. 대집단으로 도약하지 못했다.
의리 - 집단이 자산을 공유한다.
동원 - 집단적인 사건에 인원을 부른다.
권력 - 집단의 의사결정이 가능한 상태다.
소집 - 집단이 결정하여 인원을 부른다.
사회 - 상시로 인원이 동원되어 있다.
집단이 외부의 힘에 맞서 의사결정이 가능한 구조가 권력이다. 의사결정은 밸런스를 따른다. 약자를 차별하고 다양성을 부정하면 밸런스가 깨져서 집단적 의사결정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유 평등, 평화, 정의, 행복과 같은 말이 나온다. 그래야 인원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불을 끈다는 말이다. 관념은 공허하고 의리가 진짜다. 공유하는 자산이 있어야 불을 끈다. 지혜가 필요할 때는 똑똑한 사람을 중심으로 뭉치고, 완력이 필요할 때는 건장한 사람을 중심으로 뭉치고, 매력이 필요할 때는 센스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 그 지혜와 완력과 매력을 집단이 공유하는게 의리다. 그래야 권력을 인정하고 집단의 의사결정에 호응한다. 의리있는 집단이 의사결정을 잘 해서 살아남는다.
인간은 집단에 동원된 존재다. 동원의 근거는 의리다. 부부의 의리, 부모와 자식의 의리, 동료의 의리, 국가의 의리가 있으므로 이웃의 부름에 호응한다. 호르몬과 무의식으로 엮어진 부모와 자식의 친함은 선천적 의리다. 같은 목표를 두고 팀을 이루어 게임에 참여하는 것은 동료를 묶어주는 후천적 의리다. 선천적인 의리는 타고나는 것이고 후천적인 의리는 연습해야 한다. 동료와는 패스를 연습해서 손발을 맞춰놔야 한다. 단독 드리블의 개인기는 독점되고 패스플레이는 공유된다. 한솥밥을 먹고 한침대에서 자야 의리가 작동한다. 말로 해서는 안 되고 호르몬이 바뀌고 무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의리는 물리적으로 빠뜨려져야 한다. 전쟁이나 천재지변과 같은 재난을 맞아 공동운명체에 빠뜨려지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합리적인 결정을 한다. 내가 타인을 위해 희생하면 타인도 나를 위해 희생한다. 내가 희생해서 그 보상을 다른 사람이 받아도 상관없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다른 사람이 희생한 결과가 확률에 의해 돌고 돌다가 우연히 내게 할당된 보상이기 때문이다. 의리의 반대는 차별이다. 차별은 서로 공유하는 자산이 없다. 서로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랑우탄과 보노보와 침팬지는 아직도 그러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한다. 의리가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선 악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선이라고 한다. 악은 없고 상대적인 선의 실패를 악으로 규정한다. 악은 선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개념이다. 빛은 입자가 있고 어둠은 입자가 없다. 선은 사회라는 수렴하는 대상이 있고 악은 그 대상이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사회적 행위를 한다. 맹자의 성선설이 맞다. 인간이 악한 존재이며 교육되어야 한다는 순자의 말도 맞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대전제 안에서 문명의 진보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한 부족민의 야만성을 지적하는 말이다. 인간은 원래 선하지만 그 사회의 단위는 20명 이하의 씨족이나 100명 이하의 부족이었다. 호르몬과 무의식으로 연결된 씨족 바깥으로 나가면 인간은 낯선 타인들 앞에서 당황해 하며 악한 성질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은 본성이 악한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가 갑자기 커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악한 것이다. 호르몬과 무의식이 낯선 사람을 적대하도록 충동질하는 것이 악이다. 인간은 원래 스무명 남짓의 소집단이 동굴에서 생활하며 수렵과 채집을 하는데 맞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서 너무 큰 세계로 와버렸다. 적응하는데 애를 먹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특별히 훈련되고 교육되어야 한다.
진보 보수
생물에 진화는 있고 퇴화는 없으며 문명에 진보는 있고 보수는 없다. 일시적 퇴화는 있고 일시적 보수는 있다. 진보는 절대적으로 있고 보수는 상대적으로 있다. 사회는 선이 있을 뿐이고 악은 선이 기대에 못미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보하는 과정에 선두와 후미간의 간격이 멀어져서 간격을 조정하는 것이 보수다. 진보는 언제나 옳고 보수는 때때로 옳다. 진보의 전략 안에서 보수의 전술이 유의미하다. 진보는 인간과 인간의 간격이 밀착하여 더 많은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스무명 남짓 적은 숫자가 씨족단위로 생활하는데 맞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다. 고도의 산업사회와 맞지 않으므로 특별히 훈련되어야 한다. 더 많은 상호작용으로 사회가 자원을 최대한 동원하는 것이 진보다. 왕 한 사람만 의사결정에 참여하거나, 왕과 귀족만 참여하거나, 부르주아 계급만 참여한다면 국가이 동원력이 낮은 것이며 그 사회는 진보하지 못한 것이다. 전체주의는 억지로 동원하지만 그것은 흉내를 내는 것이며 실제로는 동원되지 않는다. 개인이 집단에 강제로 끌려와서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자원을 최대한 의사결정에 동원하는 진보한 제도이다.
주체성 타자성
동원하는 쪽이 주체라면 동원에서 배제하는 쪽이 타자다. 주체냐 타자냐는 사건에 따라 다르다. 밥을 먹을 때는 식구들이 동원된다. 식구가 주체다. 함께 밥을 먹지 않는 외부인은 타자다. 놀이를 할 때는 아이들이 동원되지만 밥을 먹을 때가 되면 각자 제 집으로 돌려보낸다. 유년기와 소년기에는 언제나 동원되고 소집되는 수동적인 역할만 맡게 되고 본인이 주체가 되어 능동적으로 인원을 동원해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누구를 왕따를 시키고 이지메를 하며 동원을 학습하려고 한다. 누군가를 적대해야 자기편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무명 남짓 소규모 씨족단위에 맞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므로 의식적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문명인이 될 수 없다. 소인배는 자신을 타인에 의해 동원되기만 하는 약자로 규정하므로 주체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스스로 소집권을 발동하지 않는다. 어른이 되려면 인류단위, 천하단위, 역사단위로 동원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능동적으로 게임을 설계하고 타인을 초대하여 인원을 동원하는 것이 주체성이다. 타인을 일단 적으로 간주하고 집단의 동원에는 응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소집에 반대하는 방법으로만 목소리를 내는 것이 타자성이다. 주체성이 지나치면 참견쟁이가 되고 타자성이 지나치면 안티가 된다. 서구는 타자성이 지나쳐서 망하고 동양은 주체성이 지나쳐서 망한다. 기본적으로 타인은 남이라고 선을 긋고 의리를 쌓아서 의식적으로 동원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낯선 사람을 동료로 간주하고 참견하는 행동은 주책이다. 인간은 집단과 결속되어야 안심되는 존재다. 타자성이 부족하면 속고, 휘둘리고, 낚이고, 당한다. 주체성이 부족하면 고립된다.
자아, 소외, 자유의지
자아는 나의 주체적인 의사결정권이다. 권력은 동원에 의해 성립한다. 동원의 주체가 자아다. 나의 몸과 마음도 때로는 내것이 아니다. 동원하여 내것으로 만들어야 알콜중독, 도박중독, 게임중독에 빠지지 않는다. 각종 중독은 나의 몸이 동원을 거부하고 나의 권력을 배반하는 것이다. 아기는 자아가 미성숙하므로 의사결정을 엄마한테 위임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남탓을 일삼고 벌여놓은 일에 책임지기를 거부하며 유아적인 퇴행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아가 발달하지 못한 것이다. 권력보다 현찰을 원하는 사람은 자아가 희미한 사람이다. 자아는 심리적 동원에 의해 확대된다. 나의 영역, 세력, 서열이 나에 속한다. 자아는 어느 단위에서 게임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더 큰 단위의 게임에 참여해야 한다. 개인단위, 가족단위, 동료단위, 부족단위, 국가단위를 넘어 인류단위의 게임에 동원되어야 한다. 천하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은 자아가 천하단위로 확대된 것이다. 반대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이겨먹으려고 하거나 동료를 경쟁상대로 여기는 사람은 자아가 축소된 것이다. 큰 게임 안에서 작은 게임이 기능한다. 그것이 소속이다. 반대로 금 밖으로 밀려나고 배척되고 소외될 수 있다.
자아는 세상을 향하여 능동적으로 게임을 거는 것이며, 소외는 게임에 참여하지 못하고 금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고, 자유의지는 게임의 참가여부를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게임의 주최측이 되어 적극적으로 자신의 게임을 개설하고 타인을 초대하는 것이 자유의지다. 자유의지가 없으면 인간이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는 당연히 있다. 결정론은 모든 것을 사전에 정하는 것인데 이 방법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세상은 확률에 의해 작동하고, 확률은 게임에 의해 작동하고, 게임은 상호작용의 랠리가 권력을 얻어 대칭을 지배한다. 랠리 1로 대칭 2를 결정하므로 비용이 절약된다. 확률은 자원을 대칭적으로 조직하여 비용을 줄인다. 사회를 전방위로 50대 50으로 균형있게 만들면 의사결정에 드는 비용이 절약된다. 남자든 여자든 한쪽이 강해서 밸런스가 깨지면 자원이 동원되지 않아 비용이 많이 든다. 남자만 참여하거나 여자만 참여하면 손발이 맞지 않아 의사결정에 실패한다. 그 집단은 망한다. 살아남은 집단은 보다 효율적인 집단이며 효율적인 집단은 대칭적인 집단이며 대칭은 힘과 속도의 바꿔치기다. 당장의 이득과 나중의 권력을 교환한다. 게임의 참여자는 자체동력이 있고 자체엔진이 있고 자기계획이 있고 자기가 설계한 게임의 주최측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자유의지다. 외부의 눈치를 보고 타인의 평판공격에 신경쓰며 집단의 무의식에 휘둘리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게임에 복무하는 것이다.
영역 세력 서열
인간의 행위는 다분히 동물적 본능에 지배된다.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은 영역, 세력, 서열로 권력을 창출한다. 무리가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숫자를 불려서 더 큰 세력을 이루고, 무리 안에서 더 높은 서열을 차지할 때 동물은 권력을 차지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때 동물의 마음은 편안해진다. 영역, 세력, 서열이 집단의 공유자산이다. 자신이 서열이 낮은 것은 참지만 서열이 전혀 없는 무질서한 상태는 참지 못하는게 인간이다. 서열이 고착된 사회는 비효율로 망한다. 서열은 신분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고 사건에 따라 정해진다. 사건이 지혜를 필요로 하는지, 완력을 필요로 하는지, 매력을 필요로 하는지에 따라 서열이 순식간에 새로 정해져야 좋은 동원체제를 가진 좋은 사회다.
동물은 서열싸움이나 짝짓기를 통해 서열을 높인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집단의 서열구조 안에서 호흡하기를 원한다. 진보가 새로운 권력을 창출할 의도로 기성권력의 서열구조를 깨뜨리므로 노인들이 불안해진다. 권력은 환경에 대한 통제권이며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지 못해도 권력구조가 작동하고 있어야 인간은 안심한다. 보수들이 걸핏하면 간첩소동, 빨갱이 소동을 벌이는 이유는 권력의 현장을 목격해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소는 장벽 안에서 편안하고 인간은 권력구조 안에서 편안하다.
인간은 환경에 반응하는 존재이며 단지 반응을 원한다. 환경과의 긴밀한 상호작용을 원한다. 영역은 자연환경, 세력은 사회환경, 서열은 내부환경이다. 악기가 소리를 내지 못하면 망한 것이다. 환경이 반응하지 않으면 망한 것이다. 긴밀한 상호작용 안에서 인간은 편안해진다. 자유 평등 정의 따위 관념적 접근이나 동기 야망 욕망 목적 따위 심리학적 접근은 공허하다.
하나의 존재는 다섯가지 필수요소로 이루어진다. 하나라도 모자라면 존재는 불성립이다. 도구라면 날, 손잡이, 몸통, 방향성, 기세가 있다. 칼이라면 칼날과 손잡이가 겹치는 부분을 슴베라고 한다. 슴베는 손잡이에 박혀서 보이지 않지만 그 부분이 취약하므로 목쇠로 보강한다. 대검은 그 부분에 날밑을 끼워 보강하고 손목을 보호한다. 칼은 머리가 뾰족해야 한다. 그것이 방향성이다. 날은 예리해야 한다. 그것이 기세다. 칼을 만들려면 반드시 다섯 가지를 결정해야 한다. 칼등, 손잡이, 슴베, 칼끝, 칼날이다.
관찰해보면 아무리 간단한 구조라도 최소 다섯으로 성립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건물을 짓자면 기둥이 최소 셋은 되어야 한다. 지붕에 대지까지 다섯이 필요하다. 의자 다리는 최소 셋이 되어야 한다. 앉는 방석에 지구의 중력까지 다섯이다. 가장 간단한 구조는 기둥 셋으로 이루어진 사면체다. 외력이 수평에서 작용하므로 둘의 대칭으로 받치고 축이 되는 하나까지 셋에 자체의 질량과 지구의 중력까지 다섯이 있다.
자전거는 두 바퀴(대칭)+프레임(축)+핸들(방향성)+속도(기세)로 이루어진다. 사람이 걸어가도 두 발의 대칭에 몸통이 축을 이루고 전진이 방향성에 속도의 기세까지 다섯이다. 하나는 있고, 둘은 변화하고, 셋은 균형을 잡고, 넷은 힘을 몰아주고, 다섯은 외부와 연결한다. 이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존재가 성립될 수 없다. 우주는 동적환경이므로 그냥 있는 것은 없고 반드시 뭔가 외부와 연결하며 반응하고 있다.
다섯이 되는 이유는 자체를 성립시키는 기능과 외부와 연결하는 기능을 동시에 갖추기 때문이다. 컵이라도 물을 받아내고 사람과 연결한다. 사람이 그 물을 마실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컵의 테두리 곡선은 사람의 입술 곡선과 닮아 있다. 숟가락이라도 쥐는 부분과 밥을 뜨는 부분이 있다. 모든 존재는 그냥 있는게 아니라 어떤 둘 사이에서 링크를 거는 것이다. 자동차라도 굴러가는 부분과 사람이 타는 부분을 연결한다. 모든 존재는 내부를 유지하고 외부에 대응하며 내외를 연결하므로 다섯이 된다. 내부+내부변화+내외통일+외부+외부연결의 다섯이다. 안, 밖, 중간, 안쪽연결, 바깥연결이 있다.
존재는 변화를 반영하며 변화는 변하지 않는 것에 의지해서 변한다. 어떤 것이 변하려면 변하지 않는 것이 뒤에서 받쳐줘야 한다. 숟가락 날은 밥을 뜨고 손잡이는 뒤에서 받친다. 칼날은 자르고 손잡이는 뒤에서 받친다. 칼은 요리를 상대하고 손잡이는 요리사를 상대한다. 두 가지 역할을 묶어주는 가운데 부분까지 다섯이 하나의 존재를 이룬다. 가만있는 돌멩이도 스스로를 유지하고 지구의 중력에 대항하므로 다섯이 있다. A와 그 변화, B와 그 변화, 둘을 통일하는 C가 하나의 존재 단위를 이룬다. 우리는 그 C를 변화시켜 존재를 다룰 수 있다.
방향성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사건은 닫힌계 안에서 원인에서 결과의 일방향으로 간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며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된다는 순환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 사건 해석의 실패다. 언제나 닭의 전체에서 달걀의 부분으로 가지 그 역은 없다. 달걀은 품어주는 어미 없이 스스로 닭이 되지 않는다. 만약 된다면 이미 닭이다.
헤겔의 정반합은 방향성을 반대로 해석한 귀납의 오류다. 언제나 합에서 정과 반의 대칭으로 쪼개진다. 의사결정은 합이 정과 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소용돌이는 한 방향으로 돌고, 회오리바람도 한 방향으로 돌고, 우리은하도 한 방향으로 회전한다. 대칭의 상대성은 비대칭의 절대성을 도출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50 대 50으로 팽팽하게 대치해야 의사결정이 일어났을 때 진쪽이 이긴쪽을 따라온다. 90 대 10으로 천칭이 기울면 10이 떨어져 나간다.
사건은 원인에서 경과를 거쳐 결과로 간다. 중간에 경과가 있으므로 다시 원인으로 갈 수 없다. 어디로 가든 반드시 의사결정을 거쳐야 한다. 만약 결과가 다시 원인으로 갔다면 그것은 별개의 다른 사건이다. 빛이 일방적으로 어둠을 조절할 뿐 어둠은 자체의 동력이 없으므로 빛에 관여하지 못한다. 결과는 경과를 거치며 의사결정비용을 손실했으므로 원인을 통제할 수 없다. 원인은 크고 결과는 작으며 작은 것이 큰 것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존재는 축 1에 대칭 2를 더하여 셋으로 밸런스를 이루고 거기에 힘을 한 곳에 몰아주는 방향성과 치고나가는 기세까지 다섯으로 완성된다. 축과 대칭이 저울을 만들면 방향성은 저울이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고 기세는 한 번 기울기 시작하면 가속적으로 기울어 미세한 차이를 크게 벌리는 것이다. 축과 대칭은 눈에 보이므로 쉽게 판단할 수 있고 감추어진 방향성과 기세를 아는게 중요하다. 도구라면 날과 손잡이와 몸통은 보인다. 방향성은 어디가 머리인지를 판단하고, 기세는 칼날의 예리함에 반영되어 있다. 기세는 파죽지세로 치고 나간다.
일방작용이냐 상호작용이냐다. 사건은 연속적인 의사결정이며, 의사결정은 대칭을 쓰고, 대칭이 둘이라는 생각은 일방작용의 관점이고 상호작용의 관점으로 보면 축이 하나다. 하나의 축이 결정하므로 사건은 한 방향으로 작동한다. 배의 이물과 고물은 둘이지만 키는 하나다. 오른발과 왼발은 둘이지만 몸통은 하나다. 계가 자원을 한 지점에 몰아주는 것이 방향성이다. 순방향과 역방향이 있다. 순방향은 관성력을 쓰므로 의사결정비용의 손실이 낮고 역방향은 관성력과 충돌하는 백래시를 일으키므로 커다란 구조손실이 일어난다. 닫힌계 안에서 역방향 진행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효율성
방향성을 결정하는 것은 효율성이다. 의사결정은 구조손실을 일으키므로 손실을 최소화 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손실이 최대화 되면 반감기가 짧은 원자처럼 순식간에 붕괴된다. 자연이 빅뱅 이후 137억년 동안 버티고 있는 것은 손실을 최소화 시켰기 때문이다.
행군을 하는 부대가 선두와 후미 간의 늘어진 간격을 조절하려면 선두가 멈추고 후미가 전진해야 한다. 만약 후미가 멈추고 선두가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면 손해다. 시장은 물가를 올리는 방법으로 밸런스를 조정한다. 반대로 물가를 낮춰서 조절하면 큰 문제가 생긴다. 물가가 내리면 임금을 깎는데 그 경우 노동자는 밥을 굶는다. 갑자기 집세와 학비를 깎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므로 하나를 건드리면 라인을 멈추고 죄다 조정해야 한다. 순방향 조절은 관성력을 이용하므로 추가비용이 없지만 역방향 조절은 백래시를 일으켜 관성력을 상쇄시키므로 많은 추가비용이 든다. 닫힌계 안에서 자체적으로는 불가능하고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사건은 앞단계가 뒷단계를 지배한다. 앞단계가 효율성을 장악하고 뒷단계를 통제하는 것이 권력이다. 만약 뒷단계가 말을 듣지 않으면 관성력을 차단하여 효율성을 빼앗는 방법으로 애를 먹인다. 먼저 도로를 만들고 차가 가는 것이다. 도로를 틀어막으면 차가 가지 못한다. 구조의 앞단계는 한번 세팅해놓고 반복하여 사용되므로 뒷단계가 효율성의 이득을 보는데 그것을 방해하여 손실을 강요하는 것이 권력측의 텃세다. 먼저 터를 닦고 집을 짓고 가게를 연다. 먼저 와서 터를 닦은 사람이 텃세를 부리고, 그 터에 집을 지은 건물주가 갑질을 하면 가게를 여는 사람은 장사를 할 수 없다. 반대로 하나의 대지에 집을 여러 채 짓고, 건물 한 동에 가게를 여러 개 열면 뒤에 온 사람은 거저먹기로 장사할 수 있다. 보통은 앞사람이 권력을 가지고 뒷사람이 효율을 가지는데 가끔은 먼저 온 사람이 둘 다 가지려고 하므로 세상이 시끄러운 것이다.
효율적인 배치는 상부구조에 하부구조를 종속시켜서 한 묶음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하부구조가 종속되므로 상부구조에 권력이 발생한다. 큰 것에 작은 것을 연동시키고 앞선 것에 뒤따르는 것을 연동시킨다. 량 2를 운동 1이, 운동 2를 힘 1이, 힘 2를 입자 1이, 입자 2를 질 1이 해결한다. 하부구조가 두 번 움직일 것을 상부구조가 한 번 움직여서 해결한다. 질 1이 입자 2보다 낫고, 입자 1이 힘 2보다 낫고, 힘 1이 운동 2보다 낫고, 운동 1이 량 2보다 낫다. 1회의 강한 펀치가 2회의 빠른 펀치보다 낫다.
플러스알파, 권력, 이윤, 관성, 기세
사건의 진행이 순방향일 때 에너지 효율성의 수렴으로 관성력이 누적되는 것이 기세다. 축과 대칭이 밸런스를 이루고 방향성과 기세를 얻어 사건을 완성한다. 밸런스가 천칭이라면 방향성은 천칭이 한쪽으로 기우는 것이고, 기세는 한번 기울기 시작하면 양의 피드백에 의하여 가속적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기세는 외부에서 보이지 않으므로 숨은 플러스 알파가 된다. 그것이 사회에서는 권력이고, 시장에서는 이윤이고, 물질에서는 관성이다.
기세는 최종적으로 사건을 외부와 연결한다. 메커니즘 속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의 연결강도가 기세다. 기세는 고객충성도로 나타난다. 바이럴 마케팅이 흥하는 것이 기세다. 전통적으로 선거는 조직 대 바람의 대결이었다. 조직은 눈에 보이나 바람은 뒤로 감추어진다. 칼날은 예리한 것이 기세고 사람은 섬세한 것이 기세다. 센스가 있고 스마트한 멋쟁이들은 남들이 모르는 하나를 더 가지고 있는 셈이다. 기세는 숨은 플러스 알파의 형태로 감추어져서 적이 대응하지 못하므로 이기는 비결이 된다. 기세는 량을 속도에 감추고, 속도를 힘에 감추고, 힘을 입자에 감추고, 입자을 질에 감춘다. 사람은 의리가 기세다.
에너지 낙차
지렛대는 길수록 좋다. 유체는 깔대기가 좁은 곳을 통과할 때 강한 압력이 걸린다. 멀리 있는 친구가 도움이 된다. 사돈집은 멀수록 좋다. 원교근공의 법칙이다. 에너지는 확산을 수렴으로 바꾼다. 공간을 넓게 벌려 확산시킨 다음 좁은 곳으로 수렴해야 한다. 자동차는 바퀴가 작아야 연비가 좋다. 손목과 발목은 가늘어야 힘을 쓸 수 있다. 칼날은 예리해야 한다. 유체의 일점에 몰아주는 성질을 사용하려면 내부를 정렬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공간을 벌린 다음 다시 각을 좁혀야 한다. 망치가 못과 너무 가까이 있으면 안 된다. 내부에 축과 대칭의 구조를 만들어 방향성을 도출할 공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부릴 때는 처음 여유있게 풀어줬다가 강하게 조여야 한다. 처음부터 좁히면 낑겨서 옴쭉달싹 못한다. 계속 넓게 공간을 주면 말을 들어먹지 않는다. 양치기 개가 양을 몰아도 충분한 거리를 두고 몰아야 한다. 양치기 개가 가까이 있으면 양들은 어디로 가라는 말인지 알지 못한다. 양치기 개가 멀리 있으면 양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멀리 있다가 가까이 쫓아와야 하는 것이다.
같은 귀족들로만, 같은 명문대출신으로만, 같은 지역출신으로만, 같은 성별로만 모이면 역할분담을 못하고 의사결정을 못해서 기세가 없다. 서로 비벼서 머뭇거리게 된다. 명령을 내리는 보스와 전달하는 간부와 실행하는 부하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영역이 겹치지 않게 해야 한다. 후진국이 고도성장을 하는 이유다. 못 배운 문맹자들은 아는게 없으므로 시키는대로 한다. 청소년 팬들은 아이돌 스타가 조금만 반응해줘도 열광한다. 순수한 사람은 사심없이 임무를 받아들인다. 봉건시대에 계급이 발생하는 이유다. 새로운 일을 벌일 때는 장벽을 허물고 서로 힘을 합치는 평등이 낫고, 정해진 업무를 실행할 때는 차이를 만드는게 낫다. 간부와 사병이 너무 친하면 좋지 않다.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조직이 필요하다. 단 처음부터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처음에는 널널하게 풀어줬다가 실무에 들어가서는 사정없이 몰아쳐야 한다. 진보는 널널하게 풀어주다가 망하고 보수는 빡빡하게 몰아치다가 망하는데 상황에 맞게 조절하되 선확산 후수렴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
구조손실
계는 연결이다. 의사결정은 연결을 단절로 바꾼다. 내부에서 잘게 끊어진다. 나무의 가지 끝으로 갈수록 잘게 나눠진다. 의사결정은 에너지의 방향전환이며 처음 상태가 연결이므로 거기서 일어나는 어떤 결정은 그 연결을 끊는다. 연결이 끊어진 것이 엔트로피 증가다. 이쪽을 끊으면 저쪽에 가서 붙으므로 전체로는 본전이지만 열린계가 그러하고 닫힌계 안에서는 의사결정비용이 소모되므로 조금이라도 끊어지는 쪽이 우세하다. 축 1이 대칭 2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므로 그 하나가 끊어지는 것이다. 의사결정은 대칭을 쓰고 대칭은 둘이 마주보며 거기서 어떤 의사결정은 마주보는 접점을 손실한다. 당구공을 치는 것은 사람이 외부에서 쳐주므로 열린계다. 당구공이 스스로 치라고 하면 무조건 손실이 일어난다. 지렛대의 받침점을 쓸 수 없는 우주공간에서 방향전환을 하는 방법은 몸통을 둘로 자르는 것이다. 개스를 분사하든 방귀를 뀌든 무조건 조금이라도 떨어져 나간다. 움직이려면 하나의 방향을 선택해야 하고 그 방법은 둘의 대칭을 만드는 것이다. 대칭은 가운데서 만나므로 움직이지 못한다. 1을 떼서 날려보내고 49 대 50이 되면 우세한 50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지구에서는 받침점을 쓸 수 있으므로 떼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닫힌계를 적용하면 역시 조금이라도 떨어져 나가서 다음 차례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보통은 빛과 열과 진동으로 계를 빠져나간다.
통제가능성
세상은 전방위로 대칭되어 있다. 선과 악, 진보와 보수, 정의와 불의, 합리와 실용처럼 대칭되는 둘 중에서 한 쪽이 옳다는 근거가 있는가? 수학적 근거를 대야 한다. 막연히 옳으니까 옳다는 식으로 말하는게 보통이다. 그러다가 선이 독선이 되기가 다반사다. 진보가 폭주하다가 보수의 반동을 불러 일으키는게 보통이다. 보통은 의도가 선하면 선하다고 하지만 많은 경우 축을 장악하지 못하므로 역설이 작용하여 의도와 반대로 된다. 선의로 한 일이 나쁜 결과로 되돌아온다. 세상은 상호작용이므로 인간의 책임은 절반이다.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고 그냥 일이 그렇게 흘러간 것이다. 인간들은 분명한 의도가 없다. 의도는 남들이 물어보니까 둘러대는 말이다. 많은 경우 옳다 그르다로 판단할 수 없으므로 통제가능성으로 논해야 한다. 옳으니까 하는게 아니고 에너지가 걸린 동적상태에서 뭐라도 해야하는데 유일하게 그것을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것이다. 단 단기적, 국지적, 일시적으로 할 수 있는게 아니라 장기적이고 전면적으로 할 수 있으며 지속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목수가 집을 짓는다면 지을 수 있는 방향으로 짓는 것이다. 집이 무너지면 안 되니까. 사람의 입장을 빼고 일 자체의 메커니즘 논리를 따라 할 수 있는 대로 하는 것이 통제가능성이다. 메커니즘은 순방향과 역방향이 있어서 역방향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
에너지는 계의 통제가능성이다. 날아가는 화살은 궁수에게는 통제가능성이 있다. 통제가능성이 다른 말로는 권력이다. 앞단계의 결정이 뒷 단계의 결정을 제한하는 것이 권력이다. 권력은 사장에서 이사로, 부장으로, 과장으로, 말단으로 한 방향으로 작용한다. 어떤 사람에게 권력이 있는 이유는 그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갤리선의 노는 여러 노잡이가 고수의 북소리에 맞춰서 어렵게 방향을 틀지만 범선의 키는 하나만 움직여서 방향을 튼다. 자동차의 바퀴는 네 개지만 핸들은 한 개다. 네 개의 바퀴가 각각 별도로 움직여서 방향을 트는 것보다 핸들 한 개로 방향을 트는게 효율적이다. 맞물려 돌아가는 메커니즘 속의 구조적 효율성에 의해 권력이 형성되며 그것이 통제가능성이고 방향성으로 나타난다.
대칭, 밸런스, 코어, 지렛대
자연의 의사결정은 작용 반작용을 반영하며 대칭을 따른다. 대칭을 반영하는 구조는 모두 천칭이다. 천칭이 곧 밸런스다. 모래시계는 가운데가 잘록하다. 모래시계를 눕혀놓으면 천칭과 같다. 우주 안의 모든 구조는 결국 천칭이다. 천칭은 축 하나와 대칭 둘이 Y자 모양을 이룬다. 근육 둘이 유체를 이루고 뼈 하나로 이루어진 강체를 통제하듯이 자연의 모든 의사결정은 천칭저울의 2와 1 사이에서 일어난다.
손가락이 다섯인 이유도 움직이는 대상을 통제하려면 실시간으로 천칭을 도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손가락 셋이 축과 두 접시라면 나머지 두 손가락은 접시에 올려지는 추와 물체다. 잘 살펴보면 자연의 모든 것이 천칭저울의 변형임을 알 수 있다. 나무가 좌우대칭을 이루는 것은 천칭과 같다. 설악산의 거친돌이 양양 해변까지 굴러가면 둥글둥글한 몽둘이 된다. 전방위로 대칭이 아니면 깨지기 때문이다.
대칭과 코어가 밸런스를 이룬다. 코어는 대칭의 축이다. 모래시계의 잘록한 부분이 코어다. 천칭의 가운데 기둥이 코어다. 컴퍼스의 센터다. 천칭의 축은 가운데 있지만 대저울은 한쪽 다리를 길게 빼서 지렛대를 만든다. 대저울은 힘 1과 운동 2의 대칭을 만들고 운동을 길게 빼서 더 쉽게 계량한다. 도르래는 힘을 고정시키고 운동거리를 늘려서 쉽게 대칭을 이룬다. 대칭은 힘 1이 운동 2를 갈음하므로 운동이 더 조절하기 쉽다.
인간이 꾀하는 일이 대부분 상대의 몸통에 지렛대를 박으려는 것이다. 어떤 의도를 관철하여 무엇을 얻어내려는게 아니라 일단 지렛대를 박아서 상대의 패를 읽고 응수타진 하려는 것이다. 떠보기 행동이다. 약자가 강자에 대항할 때 그러하다. 원하는게 없고 일단 상대와 연결고리를 만든 다음 상대를 코너로 몰아붙인다. 재갈을 물리고 고삐를 조인다. 자신이 갑이 되려고 한다. 어떻게든 상대의 반응을 끌어내고 해결책은 그 다음에 생각하려는 것이다. 나와 상대방 사이에 저울을 설치하려고 한다.
살을 제거하면 뼈가 남는다. 중복과 혼잡을 제거하면 구조가 남는다. 구조의 반대는 복잡이니 곧 중복과 혼잡이다. 세상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이라는 집의 뼈대가 된다. 구조는 의사결정구조다. 의사결정은 사건 속에서 일어난다. 사물은 관찰하면 되는데 사건은 해석되어야 한다. 구조론은 사건을 해석하는 도구다.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일찍이 사물에 대한 관점은 있었어도 사건에 대한 관점은 없었다. 아무도 사건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자가 말하는 것이다. 사건은 의사결정의 연결이며 의사결정은 닫힌계 내부에서 대칭을 이루고 축을 이동시켜 또다른 대칭을 만드는 방법으로 계 내부의 에너지적인 모순을 처리하는 형태로 일어난다. 하나의 밸런스에서 또다른 밸런스로 옮겨가는 것이 사건이다. 한 가지 모순의 해소가 또다른 모순을 일으키므로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마침내 천하에 망라되었다.
사건에는 밸런스를 조직하는 공간의 방향과 밸런스를 옮겨가는 시간의 순서가 있으니 질서가 된다. 사건에는 질서가 있으므로 우리는 추론하여 사건의 다음 단계를 내다볼 수 있다.
자연이 먼저 있었고 인간이 나중 왔으며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에서 변화가 일어났고 인간의 지식은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다. 변화를 어떻게 추적할 것인가? 변화는 움직이고 움직임을 따라잡는 것은 관점의 이동이다. 주체의 관점과 객체의 관점이 있다. 보통은 객체의 변화를 추적하지만 주체도 변한다는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불변의 잣대로 우리는 변화를 계측할 수 있다. 사물이 궁극적인 단계에서는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이 원자론이고 알고보니 그것도 변한다는게 양자역학이다. 사물은 변하지만 그 사물을 태우고 가는 사건의 질서는 변하지 않는다. 사건의 질서야 말로 우리가 의지해야할 불변의 절대진리다.
영어 truth는 단순히 참인 진술을 뜻하지만 우리말 진리는 더 큰 의미가 있다. 절대적이고 유일하고 불변하며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진리다. 사물에는 그것이 없지만 사건에는 그것이 있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우리는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사건의 연결고리를 장악하고 계를 통제할 수 있다. 하나의 스위치를 조작하여 일만 개의 가로등을 켜고 끌 수 있다. 산의 정상처럼 뾰족한 그것은 있다. 그것을 표현하기에는 인간의 언어가 부족하다. 언어를 탓해야지 진리를 탓하면 안 된다. 구조론이 사건의 해석에 쓰이는 새로운 언어를 공급한다.
존재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바둑이라면 바둑알과 대국이 있다. 바둑알은 보인다. 대국은 보이지 않는다. 컴퓨터라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있다. 하드웨어는 보인다. 소프트웨어는 보이지 않는다. 생물이라면 세포와 생명이 있다. 세포는 보인다. 생명은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사물과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물은 보이고 사건은 보이지 않는다. 구조론은 보이지 않는 사건을 해석하는 도구다.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물질과 시공간이 알려져 있다. 시공간은 그 정체를 알 수 없고 보통은 물질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물질은 바둑알처럼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질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물질은 원자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집합이 뭐지? 그건 수학자에게나 물어보셔. 이러면 피곤하다. 바둑의 대국은 잘 모르겠고 눈에 보이는 바둑알만 논하자고 하면 피곤하다. 원자든 소립자든 바둑알에 불과하다. 바둑알은 하드웨어이고 소프트웨어에 해당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인간은 핵심을 빠뜨리고 말하기 좋은 것만 말하는 경향이 있다. 물질은 쪼개보면 된다. 물질은 말하기 좋은 것이다. 말하기 힘든 것은 집합이다. 집합에 대해서는 얼버무리고 물질에 대해서만 주목한다. 물질은 쪼개보면 되는데 원자는 쪼갤 수 없다. 좋은 변명거리가 생겼다. 소립자를 쪼개서 더 작은 것을 찾을때까지 결론을 유보한다. 교묘한 속임수다. 원자나 소립자는 바둑알이고 대국을 봐야 한다. 원자가 아니라 집합을 봐야 한다.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를 봐야 한다.
수학은 숫자와 셈으로 이루어진다. 수학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산학이다. 수가 하드웨어라면 셈은 소프트웨어다. 1, 2, 3, 4와 같은 숫자는 눈에 잘 띄게 표시한 것이다. 그게 바둑알과 같다. 고수는 바둑알 없이도 바둑을 둔다. 진짜는 대국이고 바둑알은 대국하는 중에 헷갈리지 않게 표시한 것이다. 숫자는 표시고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셈이 수학의 본질이다. 물질 역시 그러하다.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원자 알갱이라는 빠져나가기 좋은 핑계거리고 집합이 본질이다. 항상 본질이 있다. 생물은 생명이 본질이고, 컴퓨터는 소프트웨어가 본질이고, 수학은 셈이 본질이고, 바둑은 대국이 본질이고, 세상은 사건이 본질이다.
모든 것의 출발점 찾기다. 우리는 존재의 기본적인 사항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 백지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드웨어는 보이지만 소프트웨어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므로 깨달아야 한다. 세상은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복제이고, 우주는 물질의 집합이 아니라 구조의 연결이다.
애초에 보는 방법이 잘못되었다. 사물이 아니라 사건으로 보는 관점을 얻어야 한다. 사물은 일방작용이고 사건은 상호작용이다. 일방작용의 관점으로 보면 항상 둘로 나누어진다. 대칭으로 쪼개져서 수습이 안 된다. 이원론에 다원론으로 흘러가서 산만해진다. 우리는 세상이 일원론이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안다. 바둑은 검고 흰 두 가지 색깔의 바둑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두 대국자 사이에 오가는 하나의 랠리로 이루어진다. 생물은 DNA 자기복제 하나로 이루어진다. 세상은 물질이 집합된 것이 아니라 사건이 복제된 것이다. 집합의 원소를 찾을 것이 아니라 복제의 원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의사결정구조다.
정명사상 괴력난신
공자의 가르침은 정명사상이다. 근거 없는 개소리를 하지 말자는 거다. 소인배의 비뚤어진 권력의지가 근거없는 개소리의 원인이다. 적은 비용을 들이고 관심을 끌고 주목받으려는 행동이다. 이들은 자신을 집단 앞에서 무력한 약자로 규정한다. 약자이므로 강자의 횡포에 맞서려면 개소리를 좀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각종 음모론, 초능력, 사차원, 지구평면설, UFO, 귀신, 도깨비, 천국, 내세, 무한동력 따위 다양한 개소리가 있다. 홀리지 말아야 한다. 구조론은 사건 전체를 한 줄에 꿰어낸다. 사건의 맥락과 연결되지 않고 밖에서 겉도는 주장이 개소리다. 신토불이, 유기농, MSG 공포증, 각종 음식포비아도 마찬가지다. 진리의 큰 길을 끝까지 가지 않고 도중에 주저앉아 작은 점방을 내로 본전을 회수하려는 몸부림이다. 주술, 무속, 사이비종교, 다단계, 환빠, 창조과학회, 안아키들도 마찬가지다. 검증시스템이 없는 한의학도 비판되어야 하고 기성종교도 비판되어야 한다. 심리학, 사회학도 과학보다 주술에 가깝다. 이들의 목적은 상대를 이겨먹으려는 것이다. 진실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이겨먹는데 관심이 있다. 개소리를 하는데 1의 비용이 든다면 과학자가 조목조목 따져서 개소리를 비판하는 데는 그 10배의 비용이 든다. 소인배는 어깃장을 놓아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을 지출하도록 강요한 다음 자신이 이겼다고 여긴다. 상대를 낚고 조종하고 조롱했으니 자신이 이겼다는 거다. 집단의 외곽에서 겉돌면서 집단의 반응이 궁금한 소인배의 집적거리기다. 어린애가 여자아이에게 말을 걸 용기가 없으니 주변을 맴돌면서 훼방을 놓는 행동이다. 애초에 상대를 이겨먹으려는 저의를 숨기고 있는 자는 어른들의 대화에 끼워주면 안 된다. 말장난에서 이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언어를 파괴하는 것이다. 깨진 유리창 이론을 떠올려도 좋다. 이들이 유리창을 깨도록 방치하면 인류의 공동자산인 언어가 맨 먼저 희생된다.
관점
인간은 그냥 보는게 아니고 관점이라는 도구로 본다. 관점에는 절대성과 상대성, 객관성과 주관성, 존재론과 인식론, 연역과 귀납이 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이 부분을 각각 보느냐 아니면 한 줄에 꿰어 사건의 전모를 통짜덩어리 시선으로 보느냐다. 관측대상이 움직이고 관측자가 움직이므로 관점의 차이가 발생한다. 관점에 따라 다르다고 물러나면 안 되고 관점을 통일시켜야 한다. 사물을 보는 일방작용의 특수성 관점에서 사건을 보는 상호작용의 보편성 관점으로 갈아타지 않으면 안 된다. 관측자가 판단기준이 되는 주관의 오류, 자기소개의 오류를 극복하고 객체 자체의 내재한 질서로 보는 시선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눈에 보이는 A를 보면 안 되고 'A면 B다'의 메커니즘으로 보는 수학적 사고를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냥 '산이 높구나.' 하면 안되고 '산이 높으면 물이 깊구나.' 하고 대칭시켜 봐야 한다. 물이 깊으면 고래가 산다. 대칭을 다음 단계로 계속 연결시켜 가야 한다.
관념
이데아, 원자, 이성, 영혼, 유토피아, 이상향, 성찰, 진정성, 자유, 평등, 평화, 정의, 행복 등의 관념어들은 모두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이나 기독교의 신 개념에서 한 조각을 떼어낸 것이다. 신은 완전하며 그것을 반영한 것이 이데아이며 그것이 물질에서는 원자이며 사유에는 결정론에 기계론, 운명론이고 인간에게는 영혼이나 이성의 형태로 반영될 것이며 그것을 구현하면 유토피아이고 그것이 내게 주는 것은 자유이고 사회에 주는 것은 평화이며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평등이며 하는 식으로 제멋대로 주워섬기는 것이다. 근거는 없다. 그냥 떠들어대는 것이다. 말 갖다 붙이는데 누가 부가세 내라는 것고 아니고. 인간에게는 이상주의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방향판단만 해야 한다. 플러스는 곤란하다. 어떤 목표에 도달하려고 하면 안 된다. 아닌 것을 배척하면 남는 것이 정답이다.
3대 개소리가 있다. 남들 앞에서 허세 부리려고 마구잡이로 지어내는 괴력난신 개소리가 첫째요, 신의 완전성이나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한 조각을 떼어낸 관념놀음 개소리가 둘째요. 근거없이 갖다 붙이는 심리학과 사회학의 개소리가 셋째다. 수학과 물리학에 근거를 두지 않으면 가짜다. 우리는 목적지 없이 나침반만 가지고 길을 가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떤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필요한게 아니라 우리 안에 넘치는 에너지를 풀어놓을 무대가 필요한 것이다. 삿된 것을 버리면 남는 것이 정답이다. 방향을 판단할 뿐 목표를 찍지 않는다. 인간의 최선은 가슴에 이상을 품고 부단히 전진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상호작용을 증대시켜 가는 것이며 랠리를 이어가는 것이다.
어디에 도달하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어디서 출발하느냐가 중요하다. 인간을 격발하는 것은 만남이며 만남의 현장에서 얻어지는 전율이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열정이다. 열정을 품고 천하에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며 결말은 상호작용 속에 확률로 용해되므로 신경쓰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기회가 알고보면 다른 사람이 일으킨 사건의 결과가 확률적으로 내게 배당된 것이므로 내가 또한 사건을 일으켜 천하의 확률에 보태는 방법으로 보답할 뿐 그 배당이 누구에게로 가든 상관없다.
깨달음
인간은 생각한다고 믿지만 대개 거짓이고 그냥 생각나는 것이다. 생각을 퍼즐을 맞추듯이 하나씩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떠오른다. 연못에 돌을 던지면 물속에 가라앉은 것이 수면 위로 떠오르듯이 생각은 단서를 투척하면 문득 떠오르는 것이다. 극장의 스크린에 영상이 비치듯이 뇌의 스크린에 아이디어가 비친다. 그럴 때 필이 꽂히는 것이다. 깨달음은 그 저절로 떠오르는 아이디어의 패턴을 분석하여 의식적으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이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고 했듯이 아이디어를 포드시스템으로 복제할 수 있다.
거울의 상은 반전된다. 카메라 필름도 색이 반전된다. 인간이 눈으로 본 것은 죄다 잘못 본 것이다. 이를 바로잡는 해석이 중요하다. 눈으로 본 것은 부분이고 사건은 전체다. 부분에서 전체로 갈 수는 없다.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기 때문이다. 부분의 합에 없고 전체에 있는 것은 자원들의 결합각이다. 깨달음은 자연의 있는 그대로를 복제하여 자연의 전개하는 순서대로 인식하게 한다. 자연은 큰 것이 작은 것을 포함한다. 벼리에 갈피가 딸려간다. 기승전결로 가는 사건의 전체를 대칭의 방법으로 차곡차곡 포개서 한 줄에 꿰어 통짜덩어리로 인식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정상에서 전모를 보는 시선을 얻어야 한다. 귀납에서 연역으로,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일방작용에서 상호작용으로, 상대성에서 절대성으로 사유를 갈아타지 않으면 안 된다.
의하여 위하여
자연에 의하여는 있어도 위하여는 없다. 위하여는 억지로 말을 짜맞춘 것이다. 인간은 등 뒤의 늑대에게 쫓기면서 눈앞의 꽃에 반했다고 둘러댄다. 면전의 플러스 요소는 가짜고 배후의 마이너스 원인이 진짜다. 섹스나 쾌락의 플러스 요인에 집착하는 사람은 다른 곳에 불안과 스트레스라는 마이너스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 저쪽을 피해서 이쪽으로 도망온 것이다. 누가 물어보니까 그냥 말하기 좋은 대로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는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상호작용은 목적이 없다. 에너지 흐름에 휩쓸리는 것이다. 파도를 타는 서퍼는 자신이 결정하는게 아니고 파도가 결정하는 것이다. 배후에서 등을 떠미는 진짜 원인은 환경과의 상호작용 형태라서 설명하기 어려우므로 눈앞의 아무 것이나 눈에 띄는대로 저것을 위하여라고 둘러대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위하여는 어법에 맞지 않는 비문이다. 위하여는 하고자 한다는 뜻이다. 그것을 할 목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단순히 동어반복이다. 사실은 그것을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것이다.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이게 다 너를 위해서란다 하고 개소리를 시전한다. 걸핏하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어쩌고 하며 막연한 주장을 늘어놓는다.
특히 진화생물학에서 쓰이는 위하여라는 말은 개소리다. 진화는 상호작용이므로 목적이 있는게 아니고 방향이 있을 뿐이다. 둘이 상호작용하면 톱니가 맞물려서 한 방향으로 가게 된다. 서로 연동되는 것이다. 생물은 여러 조직이 모듈 단위로 진화한다. 단백질 하나만 바뀌어도 굉장히 많은 것이 연동되어 일제히 바뀐다. 밸런스의 원리에 의하여다. 코끼리의 코가 길어지면 그 코를 감당하게 몸도 커져야 한다. 인간의 행동이든 생물의 진화든 목적이나 동기나 의도 때문이 아니고 상호작용의 밸런스 때문이다. 밸런스가 맞지 않으면 깨지고 밸런스를 맞추면 진보하게 된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은 계의 통제가능성 때문이고 사회의 권력 때문이고 사건의 기세 때문이다. 에너지의 방향성 때문이다. 자연의 생물이든 인간사회든 밸런스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자빠진다. 새가 한쪽 다리를 들고 서 있는 것은 그게 균형을 잡기 쉽기 때문이지 체온을 절약하려는 의도 때문이 아니다.
대승 소승
인간의 행위동기는 대부분 집단과의 관계에서 주어진다. 인간의 마음은 무의식적으로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언제라도 사회의 의사결정 중심으로 쳐들어가려고 한다. 집단과 맞물려 돌아가려고 한다. 집단의 반응을 끌어내려고 한다. 북을 치면 소리가 난다. 사회를 쳐서 메아리를 들으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것이 좋다고 말은 하지만 알고보면 그게 집단이 원하는 연기를 한 것이다. 그 무대는 집단이 만들어준 무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집단이 싫어.' 라고 외치지만 사실은 이렇게 말해야 집단의 반응이 되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츤데레 행동을 한 것이다.
대승이 사건의 깨달음이라면 소승은 사물의 깨달음이다. 대승이 진보라면 소승은 보수다. 대승이 사회의 개혁을 바라는 민주당이라면 소승은 개인의 명성을 탐하는 정의당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잘못된 말이다. 방향이 틀렸다. 전체가 먼저고 부분은 나중이다. 평천하의 마음을 먹어야 국가의 모순이 드러나고, 국가를 다스릴 마음을 먹어야 가족의 문제가 드러나며, 가족을 다스릴 마음을 먹어야 수신의 문제가 드러난다. 그 전에는 수신이 잘못되어도 깨닫지 못한다. 천하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나 하나를 해결하는 것이다. 근래에 유행하는 성찰, 진정성, 품성론은 개인숭배를 조장하는 소승적 태도다. 인간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외부의 작용에 반응하는 존재다. 개인의 내면에서 뭐가 나온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달마의 면벽 9년이든, 혜가의 팔 자르기든, 스님의 장좌불와든 그게 자해에 불과하다.
합리주의 실용주의, 공사구분
인생에서 무수히 갈림길에 선다. 합리와 실용, 전략과 전술, 공자와 노자, 원칙과 변칙, 공과 사의 판단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사건과 사물처럼 차원이 다른 것이다. 공유지와 사유지는 다르다. 공적공간에서 해야하는 행동과 사적공간에서 허용되는 행동은 다르다. 광장과 안방은 다르다. 핸들은 언제라도 머리에 있고 꼬리에 없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에게 공부 열심히 해서 명문대 가라고 말할 수 있지만 공적공간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모든 사람이 서울대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괜희 경쟁률만 올라가고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지불된다. 가까운 사람이 개인적으로 질문해오면 신중하게 판단해서 실용적으로 해결하라고 조언하지만 공적공간에서는 냉정하게 인류전체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조언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참고 견뎌라고 말할 사안도 공적 공간에서는 폭로하고 고발하라고 말하는게 맞다. 공적인 발언은 합리주의를 따르고 사적인 발언은 실용주의를 따른다. 공적 발언은 사회적인 상호작용을 증대시키는 쪽으로 유도하고 사적 발언은 실제로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준다. 공적공간에서는 상호작용을 거쳐 확률 속에서 용해되므로 확률에 기여하는 답을 해야 한다. 공적공간에서 공자는 가르치고 노자는 가르치지 않는다. 전략은 가르치고 전술은 가르치지 않는다. 광장에서의 매너는 가르치고 침실에서의 테크닉은 가르치지 않는다. 합리는 함께 패스를 연습해야 하지만 실용은 각자 눈치껏 하는 것이다. 원칙은 가르치고 변칙은 각자 알아서 하는 것이다. 오자병법은 가르치고 손자병법은 눈치껏 하는 것이다. 정석은 가르치고 꼼수는 몰라도 된다. 공사구분을 해야 한다. 핸들은 언제나 머리에 있다. 공자가 머리, 노자는 꼬리다. 합리가 머리, 실용은 꼬리다. 원칙은 머리, 변칙은 꼬리다. 공은 머리, 사는 꼬리다. 머리의 원칙을 교과서에서 배운 다음 꼬리의 변칙은 현장에서 눈치껏 융통성을 발휘하면 된다.
세상은 저절로 만들어졌다. 생물은 저절로 진화했다. 자연의 변화는 저절로 일어난다. 저절로는 힘이 세다. 하느님도 저절로 앞에서는 한 수 접어준다고 한다. 그런 저절로도 약점은 있다. 신은 전지전능 하다지만 저절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한다. 저절로는 플러스를 할 수 없고 마이너스만 가능하다. 우리는 저절로의 성질을 파악하여 자연의 변화를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다.
인간의 작위는 저절로가 아니다. 목적이 있고 의도가 있다. 그런데 일이 커지면 인간의 통제력을 넘어서 저절로가 되어버린다. 이기려고 했는데 지고 살려고 했는데 죽는다. 언제나 의도와 반대로 된다. 부모가 자식을 뒷바라지 할 수는 있지만 군대를 대신 가주지는 못한다. 결혼을 대신 해주지는 못한다. 부모가 스펙을 밀어줄 수는 있지만 시험은 본인이 치러야 한다. 인생의 결정적인 장면에는 언제나 저절로가 앞을 막아선다. 저절로라는 귀신을 때려잡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많은 부분이 저절로에 지배된다. 처음에는 의도를 가지고 시작하지만 일이 커져서 인간의 손을 떠나버린다. 자식은 부모 품을 떠나고, 어린 새는 자라서 둥지를 떠난다. 인간에게서 독립하여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의 의도가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되는 것을 더 잘 되게 할 뿐 안 되는 것을 되게 할 수는 없다. 인간의 의도와 자연의 저절로가 일치하면 흥하고 인간이 저절로를 거슬러서 역주행 하면 망한다.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
저절로만 믿고 손을 놓아도 좋지 않다. 경쟁자는 저절로에 인위를 개입시켜 더 잘 되게 하는 방법으로 당신을 엿먹일 수 있다. 저절로 믿다가 망한게 신자유주의에 시장만능주의에 작은정부론이다. 소련은 범국가적으로 지원하는데 미국은 저절로만 믿다가 당한 것이 스푸트니크 충격이다. 저절로만 믿고 작은 정부를 하다가 중국에 반도체산업을 뺏겼다. 전쟁은 저절로 이기는게 아니고 이기려고 해야 이긴다.
저절로는 닫힌계 안에서 작동한다. 외부를 닫아걸고 내부의 자체논리로 움직인다. 내부를 쥐어짜서 할 수 있는게 많지 않다. 저절로는 결국 뻔한 길로 간다. 그것은 마이너스다. 닫힌계 내부에는 대칭이 있고 대칭은 축을 도출하며 계 내부에 모순이 발생하면 축을 이동시켜서 모순을 해소한다. 축의 이동에 따른 관성력이 또다른 모순을 야기하므로 모순이 외부로 배출될 때까지 의사결정은 5회에 걸쳐 반복하여 일어나며 그때마다 변화에 참여하는 영역은 의사결정비용 만큼 줄어든다. 최종적으로는 빛과 열로 변하여 외부로 빠져나간다. 열역학이 이 점을 포착한게 엔트로피 증가다.
모순이 사건의 원인이며 모순의 해소로 사건은 종결된다. 모순을 판단하는 단위가 계다. 인간은 열린계에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작위적으로 행동하는데 익숙해서 저절로를 놓친다. 맛이 날때까지 양념을 때려넣는다. 음식맛은 양념맛의 집합이다. 양념은 고유한 맛이 있다. 변화의 원인을 사물 내부의 고유한 속성에서 찾으려고 한다. 소금은 짜고 설탕은 달다. 원인은 소금에 있고 설탕에 있다. 원래 그렇다. 거기가 탐구의 한계다. 더 이상 치고나가지 못한다. 빛은 파동의 간격을 조절하여 한꺼번에 백만가지 색깔을 만들어 내는데 말이다. 귀납으로 도달된 양념종류 몇 가지로는 연역으로 복제된 백만대군을 이길 수 없다. 허무해진다. 사물 내부의 고유한 속성에서 원인을 찾으면 반드시 어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한계를 만나게 되며 '원래 그렇다. 에라 모르겠다.'로 정리된다. 틀렸다. 세상에 원래 그런 것은 없다. 변화의 원인은 사건 내부의 저절로에 있다. 고유한 속성이라는 것은 얼버무린 말이다. 상대적인 관계가 모든 것의 원인이다.
모든 원인은 계 내부의 구조적 모순이다. 밸런스가 틀어져서 새로운 밸런스로 이동하는 것이 원인이다. 내부의 틀어진 밸런스가 원인이므로 우리는 밸런스를 조정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외부에 변인이 있을 경우 더 큰 단위로 닫힌계를 지정하면 내부로 바뀌므로 역시 변인을 통제할 수 있다. 개인 내부에 밸런스가 있다. 개인에 원인이 없으면 집단 내부에 있고, 집단에 없으면 더 큰 집단 내부에 있다. 더 큰 단위로 올라가서 더 크게 판을 벌이고 장기전을 하면 답을 찾을 수 있다.
수학은 자를 쓴다. 콤파스도 있고 됫박도 있고 저울도 있지만 잘 살펴보면 자에 자를 더하면 콤파스가 되고, 콤파스에 콤파스를 더하면 됫박이 되고, 됫박에 됫박을 더하면 저울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학은 결국 자다. 자와 더 많은 자가 있는 것이다. 구조론은 대칭을 쓴다. 대칭에 대칭을 더하면 축이 생긴다. 바퀴는 대칭을 이룬다. 바퀴를 굴리면 저절로 축이 생긴다.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충돌이 도량형의 혼란 때문이다. 저마다 판단기준이 다르다. 주관으로 보는 사람과 객관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원인측을 보는 사람과 결과측을 보는 사람이 있다. 전체를 보는 사람과 부분을 보는 사람이 있다. 절대성으로 보는 사람과 상대성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왜 판단기준을 통일하지 않고 어지럽게 다투고 있나?
대개 자기가 기준이다. 나보다 크면 크다고 하고 나보다 작으면 작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기소개가 된다. 객관적 기준을 세워야 한다. 수학은 1이 기준이다. 1은 눈금 하나를 가진 자다. 2는 1의 두 배, 3은 1의 세 배다. 수학은 기준이 객체에 있으므로 객관적이다. 관측자가 1로 고정되므로 절대적이다. 수학의 자는 사물을 잰다. 그렇다면 사건은 무엇으로 재는가?
존재는 사건이다. 사건은 변화를 반영한다. 변화는 닫힌계 안에서 일어난다. 수학은 죽은 사물을 잴 수 있을 뿐 살아있는 사건을 잴 수 없다. 변화가 닫힌계 내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물은 외부를 측정하고 사건은 내부를 측정한다. 살아서 움직이는 사건의 내부로 진입할 수 없으므로 수학은 사건을 측정할 수 없다. 사슴을 재려면 죽여야 한다. 들판에서 달리고 있는 사슴의 내부사정을 잴 수 없다.
구조론은 대칭이 기준이다. 대칭은 객체 내부에 있으므로 절대적이다. 안과 밖의 대칭을 적용하여 객체 내부로 진입할 수 있고 내부에서 다시 머리와 꼬리의 대칭을 찾는다. 대칭은 나란히 가는 것이다. 변화 중에서 나란한 것이 구조론의 판단기준이다. 변화를 나란히 쫓아가므로 살아서 움직이는 존재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다. 우리는 두 가지 관측법을 알고 있다. 하나는 관측자가 잣대가 되는 주관적, 상대적 관측법이고, 둘은 1을 기준으로 삼는 수학의 객관적, 절대적 관측법이다. 관측자의 주관에 따라 상대성이 개입하는 자기소개 습관을 버리고, 수학의 객관적 관측법을 써야 한다. 문제는 수학이 사물의 외양을 잴 뿐 사건 내부를 잴 수 없다는 점이다. 의사결정은 닫힌계 내부에서 밸런스 이동이다. 수학은 이미 끝난 사건의 죽은 결과를 잴 뿐이다.
수학은 사물을 재고, 죽은 것을 재고, 밖에서 재고, 결과를 재고, 부분을 잰다. 구조론은 사건을 재고, 산 것을 재고, 안에서 재고, 원인을 재고, 전체를 잰다. 수학은 1을 잣대로 삼고 구조론은 대칭을 잣대로 삼는다. 수학은 불변을 재고 구조론은 변화를 잰다. 구조론을 근본으로 삼고 수학이 구조론을 보조해야 바르다. 달리는 사슴을 재려면 사슴과 나란히 달려야 한다. 대칭으로 변화를 잴 수 있다.
은하는 왜 회전하는가? 수도꼭지를 틀어보자. 수압을 약하게 해야 한다. 물줄기가 한 방향으로 회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회전하지 않으면 살짝 건드려서 회전을 유발할 수도 있다. 싱크대에 물을 채웠다가 마개를 빼 보자. 일정한 조건에서 소용돌이를 볼 수 있다. 역시 살짝 건드려주면 소용돌이가 잘 일어난다. 은하의 회전이나 지구의 공전이나 수도꼭지의 회전이나 싱크대의 소용돌이나 같다. 움직이는 계가 밸런스를 이루는 가장 쉬운 방법이 회전이기 때문이다. 외력에 대항하는 가장 효율적인 배치가 밸런스다. 외력이 작용하면 계는 깨지거나 밸런스를 이룬다. 깨지면 다른 것에 흡수되므로 밸런스를 이룬 것만 살아남는다.
은하든 수도꼭지든 싱크대든 태풍이든 소용돌이든 닫힌계다. 닫힌계 안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일은 수학적으로 해명된다. 인위적으로 회전을 설계할 수 있다. 양자역학의 여러 성질도 물의 회전과 같다. 밸런스의 구조가 결정한다. 강아지 다섯 마리에게 먹이통 하나를 놓고 사료를 부어주면 서로 주둥이로 밀어서 한 방향으로 회전하게 된다.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이 여럿이다. 그리스의 팔랑크스 대형은 동료의 방패 뒤에 숨으려고 하므로 오른쪽으로 회전하게 된다. 외부의 영향이 없이 닫힌계 내부에서 자체적인 원인에 의해 변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닫힌계 내부에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구조는 언제나 한 방향으로 작동한다.
지금까지 인류가 탐구해 온 변화는 외부에서 원인이 주어지는 것이다. 외부에 있는 궁수가 활을 당긴다. 외부에서 큐대로 당구공을 친다. 외부에서 병원균이 인체 내부로 침입한다. 그런데 총의 영점이 맞지 않다면? 내부의 자체 원인에 의해 변인이 주어지는 경우를 탐구해야 한다. 사건의 형태로 닫힌계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를 추적하는 것이 구조론이다.
닫힌계의 이해가 중요하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3년 후 출소하였다. 그런데 꼬맹이를 안고 나왔다면? 거짓말이다. 감옥에서 아기를 낳을 수는 일은 없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3년 후 출소하였는데 죽어서 나왔다면? 그건 가능하다. 닫힌 공간에서 플러스는 불가능하고 마이너스는 가능하다. 병에 걸리거나 팔이 부러진 채로 출소할 수는 있다. 감옥에서 큰 부자가 되어 나왔다면? 플러스는 불가능하다. 사건은 닫힌계에서 일어난다. 사건은 움직이고 움직이면 외부와 단절되기 때문이다.
제로섬 게임이 이해를 도울 수 있다. 무인도에 두 사람이 살고 있다. 소득을 두 배로 올리는 방법은? 하나를 죽이는 것이다. 무인도에서는 무언가를 제거하는 마이너스 방법으로만 계를 통제할 수 있다. 닫아걸면 내부에 질서가 만들어진다. 북한이 닫아거는 이유는 내부를 통제할 의도 때문이다. 많은 흥행영화들은 닫힌공간과 촉박한 시간을 사용한다. 오징어 게임과 쇼생크 탈출만 그런게 아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걸면 선택지가 제한되므로 의사결정이 명백해진다. 하나의 결정에 많은 변화가 연동된다. 관객이 집중하게 된다. 그것이 구조다.
사건은 변화를 반영하고 변화는 움직이고 움직이면 외부와 단절되어 닫힌계가 만들어진다. 수도꼭지든 은하계든 태풍이든 양자역학이든 사건은 닫힌계를 이룬다. 배를 타든, 비행기를 타든, 자동차를 타든 움직이는 것은 외부와 단절되어 내부에 닫힌계가 만들어지고 밸런스가 성립되면 저절로가 작동한다. 거기에 필연의 법칙이 적용된다. 거기서 일어나는 변화는 내부의 자체모순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구조다.
세상은 변화다. 변화를 해명하는 것은 구조론이고, 변화를 측정하는 것은 수학이고, 변화의 결과를 확인하는 것은 과학이다. 과학은 변하지 않는 것을 규명한다. 변화는 사건 내부에서 일어나는데 과학은 사물의 외부를 관찰한다. 생물의 진화든 정치의 진보든 변화다. 우연한 변화가 아니라 질서있는 변화다. 과학은 여태 변화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할 뿐이다.
활을 쏘는 것은 구조론이고, 화살이 날아간 거리를 측정하는 것은 수학이고, 과녁에 꽂힌 화살을 찾는 것은 과학이다. 과학이 관심을 보였을 때는 변화가 끝난 시점이다. 구조론이 먼저다. 사건이 먼저 일어나고 인간들은 뒤늦게 사건을 인지한다. 사건은 원인에서 결과로 진행하고, 인간이 사건을 인지한 시점은 결과가 확정된 후다. 추론은 이를 되짚는 것이다. 결과에 서서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간다. 자연의 전개와 인간의 추론은 방향이 다르다. 혼선이 빚어진다.
학문에는 인과관계에 따른 서열이 있다. 구조론이 모든 학문의 어머니다. 구조론 > 수학 > 물리학 > 화학 > 생물학 > 심리학 > 사회학 순으로 전개한다. 사회가 그런 것은 인간의 심리가 그래서다. 심리가 그런 것은 생물의 진화가 그래서다. 생물이 그런 것은 화학이 그래서, 화학이 그런 것은 물리가 그래서, 물리가 그런 것은 수학이 그래서, 수학이 그런 것은 구조론이 그래서다.
수학의 출발점은 집합론이고 집합이 만들어지는 것은 의사결정구조다. 집합은 모인다. 그런데 왜 모일까? 사실은 복제된다. 자동차가 지나가면 바퀴자국의 집합이 탄생한다. 집합은 왜 생겼지? 자국들이 모인게 아니고 차가 지나간 것이다. 자국은 타이어의 트레드를 복제한다. 세상은 물질의 집합이 아니라 원본의 복제다. 모든 복제의 원본은 구조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문화든, 생물이든, 우주든 하나의 보편구조를 복제한다.
자궁을 통과하지 않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모든 존재는 거쳐가는 자궁이 있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 있다. 탄생의 절차가 있다.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구조에서 의사결정이 일어난다. 거기서 모두 만난다. 존재는 그 다음이다.
우리는 변화를 불길하게 여기지만 변화는 존재의 원래 모습이다. 원래 안정된 것이 어떤 불행을 맞아 변화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존재는 내부에 변화를 감추고 있다. 각운동량을 숨기고 있다. 물질은 겉으로 안정되어 있지만 소립자 단위로 쪼개보면 내부에 활발한 변화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왜 변할까? 원래 변화를 품고 있다. 그게 에너지다. 균형을 추구하는 불균형이 에너지다. 불균형은 다른 균형으로 옮겨간다. 우리는 잽싸게 빨대를 꽂고 에너지를 빼먹을 수 있다.
우리가 눈으로 목격하는 것은 안정된 물질이다. 안정된 물질은 변화가 나란한 것이다. 어떤 균형에 도달해서 겉으로는 변화가 멈추어 있다. 변화가 없어진게 아니고 겉보기의 나란함에 의해 변화가 내부로 숨겨진 것이다. 나란함을 깨뜨려서 변화를 드러내면 에너지다. 에너지를 상자에 가둔 다음 한 곳에 구멍을 뚫어 에너지가 균형을 찾아 한 방향으로 이동하게 만들면 동력을 얻을 수 있지만 상자에 가두는 비용이 더 들기 때문에 결국 도로아미타불 되는게 엔트로피다. 무한동력은 그래서 실패한다.
에너지는 원래 나란하지 않으나 외부에서 흔들면 나란해지려고 한다. 원심분리기를 돌리면 정렬한다. 외부의 흔드는 힘에 의해 나란해지려는 상태를 위치에너지라고 하고 그 위치에너지를 전달하는 것을 운동에너지라고 한다. 고대에 햇볕에 의해 가두어져 나란해진 것을 흔들어서 빼먹는 것은 화석에너지다.
에너지는 고유한 각운동량에 의해 확산방향으로 흩어지려고 하고, 흩어지면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많은 공간을 차지하면 비효율적이고, 비효율적이면 지고, 지면 깨지고, 깨지면 다른 것에 흡수된다. 살아남은 것은 이기는 것이고, 이기는 것은 효율적이고, 효율적인 것은, 공간을 적게 차지하는 것이고, 공간을 적게 차지하는 것은 밸런스고, 밸런스를 만드는 방법 중의 하나는 회전이다. 그래서 은하는 회전하고, 지구는 공전하고, 별들은 자전한다. 소용돌이든 회오리 바람이든 마찬가지다. 생물의 진화든 문명의 진보든 밸런스를 만드는 방법이다. 생물은 진화하면 이기고 이기면 살아남는다. 문명은 진보하면 이기고 이기면 살아남는다. 생물은 환경과의 밸런스를 추구하여 이기고, 인간은 사람과의 의리를 추구하여 이긴다. 자연의 생물이든 인간의 문명이든 밸런스를 추구하는 것이다. 의리는 집단의 의사결정이 가능한 상태를 추구한다.
존재는 변화이며, 변화는 에너지고, 에너지는 불균형이며, 불균형은 균형을 찾아 확산된다. 외력이 작용하면 확산보다 수렴이 더 쉽게 균형을 찾아낸다. 평소에는 흩어져서 균형을 이루지만 외력이 작용하면 소용돌이나 회오리바람과 같이 모여서 균형을 찾는다. 확산이 수렴으로 바뀌는 것이다. 수렴이 한번 시작되면 계속 간다. 질에서 입자로 힘으로 운동으로 량으로 간다. 어떤 수단으로 에너지를 외력이 작용할 수 있는 좁은 장소에 가두면 동력이 된다. 가두는 비용이 더 들기 때문에 억지로 가두면 손해라는게 엔트로피다. 중력에 의해 가둬진 에너지가 초신성 폭발로 흩어지는 중에 우연히 충돌하여 공유결합으로 가둬진게 우리가 아는 수소보다 무거운 물질이다. 겉보기로 가두어져 있을 뿐 여전히 변화는 내부에 잠복해 있다. 우주의 근본은 변화가능성이다.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다. 전체에 있고 부분의 합에 없는 것은 결합정보다. 사전 프로토콜이다. 구조는 공유결합과 같다. 결합된 정도가 차이를 만든다. 결합을 해제하는 비용이 결합을 조직하는 비용보다 작다. 여기서 방향성이 생긴다. 커플은 둘의 마음이 일치해야 하지만 이별은 한 사람의 변심으로 된다. 플러스가 마이너스보다 비싸다. 지갑을 주우려면 허리를 굽혀야 하지만 버리려면 손가락만 펴면 된다. 받는 손은 두 손이고 주는 손은 한 손이다. 그 차이가 엔트로피의 일방향성으로 나타난다.
결합은 방향이 특정되지만 결합의 해제는 무방향이다. 플러스는 마이너스에 필요없는 추가비용이 든다. 그 차이가 원인과 결과, 전체와 부분, 수렴과 확산, 커플과 솔로를 결정한다. 하나가 더 있다. 머리에 있고 꼬리에 없다. 진보에 있고 보수에 없다. 의미에 있고 허무에 없다. 의리에 있고 배신에 없다. 공자에 있고 노자에 없다. 합리에 있고 실용에 없다. 그 차이가 우주의 질서를 만드는 사건의 방향성이다. 있는 것은 매력이 있고 없는 것은 기세가 없다.
닫힌계 안에서 사건은 분리와 결합의 진행에서 방향을 특정하는데 드는 비용을 조달할 수 있는 무질서도 증가 방향으로 일어난다. 사건은 5회에 걸쳐 확산에서 수렴으로 방향을 튼다. 언밸런스에서 밸런스로 방향을 튼다. 그 균형비용 때문에 조금씩 내부가 깨지는 구조손실이 일어난다. 균형은 짝수이므로 오징어 게임을 해도 깍두기가 떨어져 나간다.
집단에서 떨어져 나가는데 드는 비용이 집단에 신규로 들여오는 비용보다 작다. 이혼비용이 결혼비용보다 적다. 버리는 비용이 사들이는 비용보다 작다. 이것이 약간의 차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큰 차이로 다가오는 이유는 의사결정은 대칭을 쓰고 ,대칭은 밸런스를 쓰며, 밸런스는 작은 차이에 크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나비 한 마리가 천칭을 완전히 기울게 한다. 밸런스는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엿먹일 수 있다.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든다. 게임과 같다. 1 대 0으로 져도 지는 것이고 100대 0으로 져도 지는 것이다. 같은 골인데 때로는 백 배로 물타기가 되고 승부처에서는 백 배로 가치가 폭증한다.
세상은 대칭에 의해 작동한다. 대칭은 순식간에 50 대 50의 균형을 만든다. 좋은 아이템을 하나 잡아서 장사 좀 되나 싶으면 경쟁자가 등장하여 판을 말아먹는다. 그럴 때 최후에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것은 결합된 정도의 차이다. 톱니가 맞물린 정도의 차이다. 끈끈하게 연결된 정도다. 그것은 기세다. 그것이 개인에게는 매력이고 집단에는 의리다. 그걸로 승부를 봐야 한다. 다른 것은 모두 밸런스 안에 반영되어 있다.
수는 숫자로 이루어지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진다면, 변화는 구조자로 이루어져야 한다. 의사결정의 1 단위가 구조다. 구조 다섯이 모여 사건 하나를 이룬다.
서구의 원자론은 변하지 않는 것을 찾으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변화를 추적하려면 변하지 않는 잣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면 동양의 주역사상, 음양오행, 연기사상은 변화 중심의 사유다. 노자의 이유극강이 그러하다. 유가 강을 이기고 변화가 불변을 이긴다. 변화를 뜻하는 음은 불길하고 안정을 뜻하는 양이 길하다는 주역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주역의 역은 원래 변화를 뜻한다는 점에서 모순이 있다.
문제는 관측의 역설이다. 서양은 변화의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주변을 탐색했으나 오히려 성과가 있었고, 동양은 정곡을 찔렀으나 도리어 혼미해졌다. 이는 직관의 한계다. 변화가 본질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직관으로 안다. 딱 봐도 정답은 변화다. 그러나 변화를 보면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흐름 속에서는 흐름을 읽을 수 없다. 불변을 봐야 변화가 보인다.
한의학의 기는 변화를 추적하려는 것이다. 실패한다. 변화의 뒤꽁무니를 쫓아서는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다. 변화의 앞길을 막아서야 한다. 변하지 않는 질량을 봐야 뉴턴이라도 힘의 법칙을 찾아낼 수 있다. 변하지 않는 바퀴축을 기준으로 변하는 바퀴의 속도를 판단할 수 있다. 21세기다. 불변을 추구하던 서구과학은 양자역학의 변화에 막혔다. 닐스 보어는 동양의 주역에서 힌트를 얻어 상보성 원리를 정립했다. 정답은 역시 변화다.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먼저 불변을 보고 다음 변화를 봐야 한다. 불변의 씨앗을 보고 다음 성장과정에서의 변화를 봐야 한다. 도장은 불변이나 도장을 찍어보면 종이와 잉크의 상태에 따라 변한다. 일란성 쌍둥이 유전자는 같은데 성장환경에 따라 변한다.
동양의 한의학은 변화하는 기를 찾으려다가 길을 잃었고, 서구의 원자론은 불변의 요소를 찾으려다가 길을 잃었다. 우주의 근본은 변화다. 변화 안에서 불변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나란함이다. 동양의 기는 변화해서 망하고 서구의 원자는 변하지 않아서 망하는데 구조론의 정답은 변화 속의 불변이다. 그것은 나란함이요 대칭이요 밸런스다. 변화의 대칭에서 변하지 않는 바퀴축이 되는 토대의 공유다. 그것이 구조다.
사물은 변하지 않고 사건은 변한다. 실제로는 그 반대다. 사건은 변하지 않는다. 사건의 진행은 변하지만 사건의 질서는 변하지 않는다. 사물은 변한다. 쇠가 녹쓸고, 소금이 물에 녹고, 생물이 죽고, 음식이 변질된다. 자동차가 달린다. 자동차는 변하지 않는다. 내부에서 변하는 것은 바퀴다. 외부에서 변한 것은 자동차와 주변의 관계다. 사건은 법칙을 따르며 사건은 변하나 법칙은 불변이다. 얕은 관찰에서는 사물이 불변하고 사건이 변하지만 깊이 파헤치면 사물이 변하고 사건이 불변이다.
우주 안에서 모든 것은 변한다. 겉보기가 변하지 않을 뿐이다. 씨앗에서 싹이 나오고, 싹에서 가지가 나오고, 가지에서 꽃이 나오고, 꽃에서 열매가 나오는 것은 변화다. 그 변화의 순서는 불변이다. 열매를 먼저 맺고 나중에 꽃이 피는 일은 절대로 없다.
쪼개지지 않는 불변의 원자는 없다. 두 변화의 나란함이 원자로 행세한다. 그것이 양자다. 쪼개면 쪼개지지만 사건을 추적하려면 쪼개지 말아야 한다. 원자의 쪼개지지 않는 성질은 추적하기 쉽도록 변하지 않고 제 자리에 가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인간의 희망사항인 것이다. 그런데 변한다. 과학계가 원자에 기대했던 제 자리에 가만이 있는 성질은 구조에 있다. 구조의 방향과 순서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원자는 하나고 구조는 둘이다. 변화하는 둘이 대칭을 이루고 나란한 것이 구조다. 나란하면 하나처럼 보인다. 둘이 하나로 행세하면 효율적이다. 그 효율성의 힘으로 외력에 맞서 자기 존재를 달성한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외력에 맞서 자기 위치를 지켰다는 말이다. 어떻게 이겼을까? 강하기 때문이다. 왜 강하지? 외력은 하나인데 구조는 둘이기 때문이다. 2는 1을 이긴다. 대표적인 것이 전자의 공유결합이다. 공유하면 효율적이고 효율적이면 안정적이다. 외력을 이기고 자리를 지켜서 존재를 달성한다. 자연계의 4대 힘 곧 중력, 강력, 약력, 전자기력이 모두 수학적으로 도출되는 구조적 효율성의 힘이다. 자연계의 4대 힘은 그렇게 했을 때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안정적이고 효율적이라는 말이다.
변화의 문제는 브레이크가 없다는 것이다. 한 번 시작되면 멈출 수 없다. 불이 번지듯이, 화약이 폭발하듯이, 돌풍이 몰아치듯이 겉잡을 수 없게 변화가 일어난다. 쓰러지는 도미노를 멈출 수 없다. 변화를 유지하면서도 멈추려면 닫힌계를 닫아걸고 변화가 내부를 향하게 해야 한다. 변화에는 비용이 소비되므로 내부를 쥐어짜기 어렵다. 구조가 변화과정에 효율성을 소비한 상태에서 또다시 효율성을 쥐어짜는 방법은? 둘이 나란한 상태에서 또다른 나란함을 만들어내려면? 내부를 쪼개서 또다른 나란함을 도출해야 한다. 이 과정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에 걸쳐 5회 반복된다.
계가 만들어지면 질에서 입자로 가며 밸런스를 얻어 안정되지만 관성력은 또다른 불균형을 야기한다. 또다른 밸런스를 찾아 축이 이동한다. 질 밸런스에서, 입자 밸런스, 힘 밸런스, 운동 밸런스를 거쳐 량 밸런스에서 멈춘다. 밸런스를 만들면서 효율성을 소비했으므로 다음 밸런스에서는 선택지가 줄어든다. 여기에 사건의 방향성이 있다. 문어가 제 살을 깎아먹듯이 내부자원을 갉아먹는 형태로 밸런스를 도출하므로 구조손실이라는 마이너스가 일어난 것이 엔트로피 증가다. 닫힌계 안에서 의사결정 참여정도가 단계적으로 감소한다. 회의를 할때마다 참여자가 줄어든다. 회원의 일부가 진행요원으로 차출되기 때문이다.
색맹이 교정안경을 쓰면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게 된다. 색각인 사람은 그것을 작은 차이로 짐작하지만, 교정안경을 쓰고 처음으로 원래의 색깔을 보면 전율한다.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영상이 유튜브에 많다. 칼라에는 흑백에 없는 다른 것이 있다. 단순히 이것과 저것을 변별하는게 아니라 사람을 잡아당기는 유혹을 숨기고 있다. 과일은 잘 익은 열매로 사람을 유혹한다. 초록은 편안함으로 사람을 유혹한다. 거기에 우리가 포착해야 할 숨은 플러스알파가 있다. 구조론에는 하나가 더 있다. 강렬함이 있다. 매력이 있다. 사람을 잡아 끄는 센스가 있다.
맹수는 움직이는 표적을 보면 흥분하고, 남녀는 성숙한 사람의 성적 표지를 보면 흥분한다. 첫 키스의 추억처럼 전율한다. 원숭이가 가지 끝에 매달린 과일을 먹게 하려면 내면에서 강하게 충동질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어린이의 눈을 뗄 수 없는 귀여움 공격이나 미인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에는 집단과의 상호작용을 늘리게 하는 자연의 전략이 숨어 있다. 옴팡지고 야무지고 까칠하고 아슬한 것이 있다. 그것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접착제가 된다.
구조를 본다는 것은 남들보다 하나를 더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밀한 유혹을 보는 것이다. 치고나가는 기세를 보는 것이다. 강렬함을 보는 것이다. 의리를 보는 것이다. 맞물려 돌아가는 정도를 보는 것이다. 사물의 표면을 보는 사람이 흑백TV를 보는 사람이라면 사건의 구조를 보는 사람은 컬러TV를 보는 사람이다. 흑백은 사실을 전달하지만 컬러는 매력을 전달한다.
세상은 대칭에 의해 돌아간다. 단순히 대칭을 이루고 끝나는게 아니라 톱니가 맞물린 정도의 차이로 조절한다. 호흡이 있고 리듬이 있고 완급조절이 있고 하머니가 있다. 긴장하고 이완한다. 축의 움직임에 의한 밸런스의 복원은 아름답다. 고저장단의 밀당이라는 플러스 알파가 당신을 흔들어 놓는다. 때로는 그 숨은 플러스 알파가 은밀히 축구장을 기울여 당신의 의도를 좌절시킨다. 뭐든 뜻대로 안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배후에서 움직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가만히 있다가 당신이 뭣 좀 해보려고 하면 갑자기 나타나서 훼방을 놓는다. 상부구조가 개입하는 타이밍과 위치를 아는 자가 배후의 숨은 힘을 역이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