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 인식론
존재론 인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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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은 자연의 모습이 뇌 안의 스크린에 비치는 것이다. 그런데 거울의 상이 바뀌듯이 왜곡된다. 이를 바로잡는 것이 존재론이다. 그냥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은 인식론이다. 거울에 비친 상은 다 맞는데 딱 한 부분이 안 맞다. 그 부분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쓸만하다. 일상생활은 인식론적 사유로 해도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중요한 부분은 지도자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고 사소한 부분은 잘못될 일이 없다. 잘못되면 지도자 탓을 하면 된다. 이게 다 히틀러 때문이다. 내 잘못이 아냐. 그런데 과학자나 지도자라면 그런 식으로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 제대로 해야 한다. 잘난 정치인들이 일반인들보다 못한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이유가 있다.
존재론은 자연의 있는 그대로를 보는 관측법이다. 그냥 볼 수 없고 특별한 도구를 써야 한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그런데 존재론에 도달하려면 일단 인식론이라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인식론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존재론의 정상을 밟은 다음에는 인식론을 버려야 한다. 일단은 거울을 사용하되 한 번 뒤집어야 한다. 우리는 거울을 보고 빗질을 하고 면도를 할 수 있다. 숙달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처음에는 안 된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뇌가 학습해서 되는 것이다. 자동차의 백미러를 보고 후진을 할 수 있지만 그것도 숙달된 덕분이다. 처음 한 번은 반드시 실수를 한다. 존재론은 간단하다. 인식론을 뒤집으면 존재론이다.
무지개를 봤다면 등 뒤에 태양이 있다. 인간은 곧바로 태양을 볼 수 없고 무지개를 본 다음 추론하여 태양을 찾아야 한다. 태양을 찾은 다음에는 무지개를 잊어버려야 한다. 그림자와 같다. 범인의 그림자를 보고 범인을 추적하지만 범인을 잡은 다음에는 그림자를 버려야 한다. 그림자에 수갑을 채워 경찰서로 끌고가려고 하는게 인식론의 실패다.
자연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고 인간은 부분에서 전체로 간다. 자연은 원인에서 결과로 가고 인간은 결과에서 원인으로 간다. 자연은 연결에서 단절로 가고 인간은 단절에서 연결로 간다. 자연은 연역하고 인간은 귀납한다. 화살은 활에서 과녁으로 간다. 인간은 과녁에 꽂힌 화살을 보고 추론하여 활을 찾아낸다. 이 방법으로는 올바른 인식이 불가능하다. 방향이 틀렸다. 부분에서 전체를 찾을 수 없다. 결과에서 원인을 되짚을 수 없다. 단절에서 연결로 복구할 수 없다.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아기는 단어를 먼저 배우고 문장을 나중 배운다. 문장을 먼저 배우고 빈 칸에 단어를 채워넣는게 존재론이다.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인식론으로 시작하지만 적절한 시점에 존재론으로 갈아타야 한다. 갈아탄 다음에는 인식론을 버려야 한다. 존재론은 무한복제가 가능하므로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 인식론의 부스러기 지식은 버려도 상관없다.
존재론의 연역은 복제한다. : 배경 -> 실체 -> 연관 -> 이행 -> 귀결
인식론의 귀납은 추측한다. : 지각 -> 수용 -> 분석 -> 종합 -> 응용
존재론은 확실한 지식이지만 복제의 원형이 필요하고, 인식론은 엉터리지만 선택지가 많지 않을 때 넘겨짚기로 빠르게 판단할 수 있다. 존재론은 올바른 지식의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인식론은 사소한 일에 써먹을 수 있으나 깊이 들어가면 거의 가짜다. 각종 음모론에 괴력난신, 초능력, 텔레파시, UFO, 천국, 귀신 따위는 인식론의 귀납에 따른 오류다. 자유, 평등, 정의, 평화, 행복, 사랑과 같은 관념어나 욕망, 의지, 의도, 목적, 탐욕, 야망 따위는 심리학적 접근이나 각종 선입견, 편견, 차별주의, 고정관념이 모두 인식론의 귀납에 따른 오류다. 택도 없는 헛소리다. 세상에 개소리가 너무 많다.
인간의 지적 활동은 뇌의 스크린에 자연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에서 촉발된다. 그림자를 곧 지식으로 간주하면 인식론의 오류다. 그림자를 단서로 삼아 자연의 진상이 인간의 뇌에 비치는 과정을 재현해야 한다. 모든 지식은 인식론의 추측과 넘겨짚기로 출발하되 그것은 잠정적인 지식으로 간주하고 존재론의 실험과 재현으로 검증해야 한다.
연역 귀납
존재론은 연역추론이고 인식론은 귀납추론이다. 연역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고 원인에서 결과로가고 연결에서 단절로 간다. 귀납은 부분에서 전체로 가고 결과에서 원인으로 가고 단절에서 연결로 간다. 연역이 올바른 추론이지만 많은 경우 연역이 불가능하다. 단서가 없으므로 추론을 시작할 수 없다. 인간이 사건을 목격했을 때는 범인이 현장을 이탈하고 난 다음이기 때문이다. 일단 귀납으로 단서를 찾은 다음 연역으로 재구성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현장검증이 그러하다.
연역 - 공유에서 다름을 추적한다.
귀납 - 다름에서 공유를 추적한다.
연역은 범인과 피해자가 공유하는 것을 먼저 찾고 그 다음에 다름을 변별한다. 치정사건인지, 재산다툼인지, 원한관계인지, 우발적 사건인지 범죄유형을 특정하는게 연역이다. 범죄의 패턴을 알고 들어가는 것이다. 치정이면 애정을 공유하고, 재산이면 돈을 공유하고, 원한이면 과거의 기억을 공유하고, 우발적인 범죄라면 공간을 공유한다. 반드시 공유하는 것이 있다. 공유하는 것을 추려내는게 연역이다. 귀납은 다름을 먼저 변별한다.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일반적인 경우와 다르므로 현장에서 단서를 확보할 수 있다. 피가 떨어져 있거나 유리창이 깨져 있다면 평범함과 다른 거다.
많은 경우 선택지가 별로 없다. 한 사람이 있는 공간에서 범죄가 일어났다면 그 한 사람이 범인이다. 귀납은 운이 좋으면 1초만에 범인을 특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한 번 잘못되면 영원히 범인을 놓친다.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 단정했다가 현장을 훼손해서 증거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연역은 가능성을 받아들여 그물을 치듯 모든 넓게 잡았다가 조금씩 좁혀서 확실하게 사건을 해결하지만 일정부분 귀납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쉬운 사건은 귀납하고 어려운 사건은 연역해야 한다.
추론은 연결을 따라가는 것이다. 한강 의대생 사건의 경우 한강이라는 지형을 통해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물 속에 발이 빠지는 뻘밭이 있었다. 문제는 인간의 태도다. 보통은 다름에 주의가 간다. 친구와 사이가 틀어졌다거나 뭔가 다른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경우는 범인이 금방 잡힌다. 며칠이 지났는데 범인을 못 잡았다면 다름이 아닌 같음을 조사해야 한다. 살인의 순간 범인과 피해자는 찌르고 찔리며 흉기를 공유한다. 범인과 피해자는 장소와 시간과 물리적 수단 셋을 반드시 공유한다. 반드시 공유하는게 있고 그게 원인이다.
질은 범인, 입자는 흉기, 힘은 장소, 운동은 범행시간, 량은 범죄 피해자다. 범인과 피해자는 이 다섯가지를 무조건 공유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들어가는게 연역이다.
연역은 수학이다. 하나의 지식을 알아낸 다음 이를 대량으로 복제한다. 귀납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연역의 집합이다. 뇌 안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르는게 연역이다. 인간의 뇌구조가 패턴을 복제하는 연역구조이기 때문이다. 패턴을 복제하도록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귀납이다. 귀납은 학습에 쓰인다. 연애를 책으로 배웠다거나 핸들 한 번 잡아보지 않고 운전할줄 안다고 믿는게 귀납의 오류다. 자전거를 배우되 먼저 균형을 잡고 페달을 밟아 전진한다거나, 수영을 배우되 먼저 물에 뜨고 헤엄친다거나, 비행기를 날리되 먼저 공중에 뜨고 그 다음에 비행한다는게 귀납의 오류다. 실제로는 항상 전체가 먼저다. 헤엄을 쳐야 물에 뜨고, 페달을 밟아서 전진해야 균형이 잡히고, 비행기가 날아야 공중에 뜬다. 인간은 언제나 귀납의 덫에 걸리므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을 절차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원인 경과 결과
사건은 기승전결로 흘러가는데 우리는 원인과 결과 두 단어로 설명한다. 터무니없는 일이다. 연역과 귀납, 존재론과 인식론의 방향성을 헷갈리지 않으려면 원인과 결과 사이에 경과를 넣어야 한다. 사건의 중심은 의사결정이다. 사건은 원인에서 의사결정이라는 경과를 거쳐 결과로 간다. 원인>경과>결과다. 원인과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문제는 대칭의 상대성이다. 우리는 상하, 좌우, 강약, 경중, 전후와 같은 대칭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그런데 사물은 대칭이지만 사건은 비대칭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통제하려고 개입하는 순간 대칭성은 사라지고 비대칭성이 드러난다. 자동차는 앞뒤가 대칭이지만 시동을 걸면 앞으로 간다. 빛은 입자가 있어도 어둠은 입자가 없다. 사물로 보면 빛과 어둠이 대칭이지만 사건으로 보면 언제나 빛이 어둠을 조절할 뿐 어둠은 빛을 조절할 수 없다.
악의를 가지고 뭐든 대칭의 상대성으로 몰아서 물타기 하려는 사람이 있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그 놈이 그 놈이라거나, 강자나 약자나 둘 다 잘못했다거나. 재벌이나 노동자나 똑같다거나 이런 식의 결론이 없는 허무주의로 유도하는 속임수 말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경과를 집어넣으면 엔트로피의 일방향성이 드러나므로 상대성으로 속일 수 없다. 사건은 언제나 위치에너지에서 운동에너지로 가고, 원인에서 결과로 가고, 연결에서 단절로 가고,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지 그 역은 없다. 사건은 화살처럼 똑바로 날아간다. 모든 사건은 A에서 B로 일직선으로 날아가며 양자가 공유하는 토대 C가 있다. C가 A와 B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므로 역방향 진행은 자연에 없다. 열린계에서 혹은 국소적으로는 역방향으로 가는 백래시가 있을 수 있다. 자동차는 앞으로 가지만 배기가스는 뒤로 간다. 그런데 떨어져 나간다. 배기가스가 뒤로 갔다고 해서 자동차가 뒤로 간 것은 아니다.
역설 이중의역설
사물은 인간이 다루는 대로 움직이지만 사건은 계에 에너지가 걸려 있으므로 대칭의 축에 걸려서 의도와 반대로 된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이기려고 하면 지고 지려고 하면 이긴다. 강체는 의도대로 되고 유체는 반대로 된다. 정치인 한 명은 강체이므로 포섭하면 의도대로 되지만 국민은 유체이므로 정치인이 공작을 하면 반대로 된다. 일방작용은 원하는대로 되고 상호작용은 반대로 된다. 반대로 되는게 역설이다.
두 사람이 한 배를 타고 있다. 이물에 앉아서 고물에 있는 사람을 쓰러뜨리려면 반대로 움직여야 한다. 상대를 넘어뜨리려다가 내가 자빠지는게 역설이다. 저울의 축이 움직이기 대문이다. 축을 장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축을 장악하려면 외부에서 들어와야 하며 닫힌계 안에서는 엔트로피 때문에 불가능하다. 왼쪽을 해결하려면 오른쪽을 먼저 조치해야 한다. 사냥감을 몰이하려면 산을 한 바퀴 돌아서 반대쪽으로 기동해야 한다.
이중의 역설은 축을 장악한 다음에는 다시 그 반대로 되는 것이다. 축을 장악하지 못하면 량은 운동에 걸려서, 운동은 힘에 걸려서, 힘은 입자에 걸려서, 입자는 질에 걸려서 의도와 반대로 된다. 숨은 플러스 알파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기세와 이윤과 권력과 관성과 효율이 작업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반대쪽에 먼저 조치해야 한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줘야 한다. 그런데 때로는 반대로 조치해도 실패한다. 그럴 때는 오히려 정면승부로 밀어붙여야 한다. 축을 선점하고 세게 밀어야 한다.
질 입자 힘의 상부구조와 힘 운동량의 하부구조가 있다. 하부구조를 잘해봤자 상부구조에서 틀어버리는게 역설이다. 하부구조는 역설이 작용하므로 항상 반대쪽에 먼저 조치하고 기동해야 한다. 적의 배후에 일대를 보내서 퇴로를 끊어놓고 작전에 들어가야 한다. 상부구조는 그런거 없고 그냥 불도저로 밀어야 한다. 축을 장악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액션은 반대가 된다.
정치인이 상대편의 실수를 추궁하여 이득을 보는게 역설이다. 박근혜의 삽질에 문재인이 이득을 봤다. 반면 안철수처럼 상대편의 실수만 기다리다가 주도권을 잃어버리는게 이중의 역설이다. 힘이 없으면 상대의 실수를 기다려야 하고 내가 힘을 가졌다면 화끈하게 밀어야 한다. 어떤 핵심을 거머쥔 다음에는 복잡한 속임수를 버리고 단순한 방법을 써야 한다. 그럴 때는 힘으로 찍어누르는 정공법이 최고의 전술이다.
세상은 상호작용이니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작은 게임은 역설이 작용하고 큰 게임은 이중의 역설이 작용한다. 역설은 상대편의 실수를 응징해서 이기고, 이중의 역설은 그 과정에 국민이 똑똑해져서 이긴다. 역설은 불의가 꼼수로 이기고 이중의 역설은 주최측이 룰을 개정해서 정의가 이긴다. 보트의 노는 반대쪽으로 움직이므로 역설이다. 배가 앞으로 가게 하려면 노를 뒤로 밀어야 한다. 범선의 키는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든 무조건 배를 전진시키는 이중의 역설이다. 키가 찾아야 할 주도권이다. 기세요, 이윤이요, 권력이요, 관성력이요, 효율성이다. 키가 없으면 가려는 방향과 반대로 움직여서 키를 장악하고 키를 장악한 다음에는 좌고우면 하지 말고 정공법으로 몰아붙여야 한다.
모순
사건은 균일한 계에서 일어난다. 사건을 촉발하는 계 내부의 불균일이 모순이다. 계는 외력의 작용에 맞서 1로 대응하여 반작용으로 되돌린다. 외력이 작용할 때 불균일로 인해 계가 1이 아니게 되면 깨진다. 에너지가 계 내부를 돌아다니다가 불균일한 지점에 수렴되며 그 지점이 조직의 약한 고리가 된다. 조직은 약한 고리를 보완하는 과정에서 발전한다.
외력은 계 내부에서 균일하게 분산되거나, 반작용의 형태로 돌려보내거나, 열과 진동의 형태로 다시 외부로 빠져나간다. 그 모순의 해소과정이 사건이다. 우주의 많은 존재가 자전과 공전의 형태로 회전하는 이유는 회전이 계를 균일하게 만드는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외력을 받은 존재는 외력을 쳐내거나 깨지거나 돌거나 동그랗게 된다. 불균일한 계는 소행성의 파편처럼 깨진다. 과일이 둥근 형태를 가지는 것도 같다. 둥글지 않으면 짜부러져서 깨진다.
투수의 공과 타자의 배트가 부딪혔는데 타자의 배트가 부러졌다면 배트 내부가 균일하지 않은 것이다. 에너지는 계 내부를 돌아다니다가 유체의 몰아주는 성질에 의하여 불균일한 한 지점에 수렴되므로 그 지점에서 깨진다. 그 지점이 조직의 약한 고리다. 조직은 약한 고리를 보완하는 과정에 진보하므로 모순이야 말로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계 내부를 효율적으로 재배치하여 모순을 제거하고 합리화 하는 방향으로 사회의 진보는 일어난다.
집단이 발전하려면 내부가 균일해야 하지만 동시에 일부 모순이 있어서 에너지 낙차를 일으켜야 한다. 글자가 어려워야 엘리트와 비엘리트가 나눠지고 비엘리트가 엘리트에 복종한다. 봉건주의가 사용하는 이 방법은 일시적 성과를 내지만 곧 한계에 봉착한다. 엘리트와 비엘리트 간에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사병이 간부를 주적으로 치는 것이 그러하다. 더 진보하려면 쉬운 문자가 보급되고 미디어가 발달해서 엘리트와 비엘리트의 간극을 없애야 한다. 그 과정에서 모순이 진보의 속도를 조절한다. 완전히 균일하면 변화가 너무 빨리 일어나고 너무 빨리 멈춘다. 진화가 너무 빨리 일어나고 너무 빨리 멈춘다.
사회가 진보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모순을 찾아내야 한다. 근래의 탈근대나, 똘레랑스나, 페미니즘이나, 정치적 올바름은 그렇게 찾아진 모순이다. 다문화니 성소수자니 하며 의도적으로 들쑤셔서 사회의 숨은 모순을 찾아내고 이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사회는 전진한다. 검찰개혁, 언론개혁, 관료개혁도 마찬가지다. 잠복한 갈등을 드러내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문제해결능력의 발달 형태로 사회는 진보한다. 옳으냐 그르냐는 중요하지 않다. 경험치가 중요하다. 문제해결능력이 중요하다. 옳지 않은 사회는 살아도 문제해결능력이 없는 사회는 죽는다. 미국이 온갖 모순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이유다.
모순이 없으면 사회는 정지하고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면 사회는 파괴된다. 모순이 구조 내부에 에너지를 수렴하는 코어를 이루고 조직의 약점인 코어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사회가 진보한다. 코어가 너무 강해도 또다른 불균일의 원인이 되므로 민주주의는 선거로 코어를 교체한다. 대통령에게 권력을 줘서 코어를 강화시키는 동시에 선거를 통해 제압하여 힘을 빼는 것이다.
상호작용 일방작용, 게임
의사결정은 축 1과 대칭된 2가 맞물려 구조를 이룬 상태에서 일어난다. 이때 대칭을 이루고 맞물려 돌아가는 2를 나누어 별도로 관측하면 일방작용이고 둘을 합쳐서 하나의 호흡으로 보면 상호작용이다. 숨을 내뿜는 호와 들이마시는 흡은 둘이지만 생명의 호흡은 하나다. 선수가 공을 때리는 것은 일방작용이고 공격과 수비 사이에 랠리가 이어지는 것은 상호작용이다.
물레방아는 물레부와 방아부로 나눌 수 있다. 이를 별도의 두 존재로 보면 일방작용이고 하나의 물레방아로 보면 상호작용이다. 선수의 시선과 주최측의 시선이 있다. 선수가 보는 일방작용의 관점으로 보면 두 팀의 대결이다. 주최측이 보는 상호작용의 관점으로 보면 하나의 시합이다. 이어지는 랠리로 보면 하나의 축이 대칭 2를 끌고 간다. N극과 S극으로 두 개의 극이 있는게 아니라 하나의 자기력선이 있다. N에서 S로 갈 뿐 그 반대는 없다. 빛이 어둠을 통제할 뿐 그 반대는 없다.
A가 움직이면 B가 움직이고 B가 움직이면 A가 움직인다. 움직이는 둘이 연결되면 하나의 메커니즘을 이루고 거기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하나의 토대에 꿰어지면 시스템이다.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바퀴는 둘이지만 공급되는 에너지원은 하나다. 두 바퀴를 각각 관찰하면 일방작용이고 하나의 에너지원으로 보면 상호작용이다. 이를 게임에 비유할 수 있다. 게임은 주최측이 있다. 주최측은 공정하지 않다. 더 많은 관객을 끌어모아 게임을 흥행시키는 한 방향으로 룰을 적용한다. 주최측은 기계적인 공정이 아니라 흥행이 되는 공정을 추구한다. 심판은 랠리가 이어지게 하는 쪽에 승리를 선언한다. 랠리가 권력을 가진다. 진화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전진한다. 인류문명 역시 상호작용의 총량증대라는 한 방향으로 전진한다.
관측 해석, 주체 객체 관측은 관측자와 관측대상이 대칭을 이룬다. 이때 판단기준이 되는 가늠자가 있다. 관측자 자신이 판단기준이 되는게 관측의 오류다. 가늠자는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데 관측자가 움직이므로 노이즈가 발생한다. 관측대상이 움직여도 노이즈가 발생한다. 보통은 관측자와 관측대상이 둘 다 정지해 있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고정된 관측자가 고정된 사물을 관측해야 올바르다. 그런데 실제로는 관측자인 주체도 움직이고 관측대상인 객체도 움직여서 노이즈를 일으키므로 해석이 필요하다. 관측의 노이즈를 제거하는 해석도구가 구조론이다.
강체는 해석이 필요없다. 사물은 해석이 필요없다. 둘 이상의 복수가 움직이면 유체가 된다. 유체는 해석되어야 한다. 사건은 해석되어야 한다. 해석은 관측의 주체와 객체를 고정시키는 것이다. 돌아다니는 것을 고정시킬 수 없으므로 대신 나란한 것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대칭이다. 객체 내부에서 나란히 가는 것을 찾으면 된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관측은 정지해 있는 객체의 외부를 조사할 때만 유효하다. 해석을 거치지 않으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만 관측할 수 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된다. 죽은 것을 관측하되 산것을 관측하지 못하고, 사물을 관측하되 사건을 관측하지 못하고, 정지한 것을 관측하되 움직이는 것을 관측하지 못하고, 표면을 관측하되 내부를 관측하지 못하고, 결과를 관측하되 원인을 관측하지 못한다. 사건과, 움직이는 것과, 산 것과, 내부와, 원인과, 유체를 관측하려면 구조론이라는 특별한 해석 도구를 써서 노이즈를 제거하고 데이터를 보정해야 한다.
구조론은 수학을 쓴다. 수학은 둘 이상이 집합을 이루고 서로 연동된다. 구조론은 복수의 사물을 서로 연동시켜서 사건화 하는 방법을 쓴다. 이때 객체 내부의 A와 B는 대칭을 이루고 나란하므로 A가 변해도 B가 따라붙는다. 상대성을 절대성으로 바꾸고, 일방작용을 상호작용으로 바꾸면 노이즈가 제거되므로 객관적인 관측이 가능하다. 관측대상 안에서 대칭된 A가 움직였을 때 B가 어떻게 맞서는지를 보는 것이다. 관측자의 개입을 배제하고 객체 내부에서 자체의 대칭을 추적하기다. 사물은 사건으로, 강체는 유체로, 실체는 관계로 바꾸어 관측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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