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의 자
수학은 자를 쓴다. 콤파스도 있고 됫박도 있고 저울도 있지만 잘 살펴보면 자에 자를 더하면 콤파스가 되고, 콤파스에 콤파스를 더하면 됫박이 되고, 됫박에 됫박을 더하면 저울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학은 결국 자다. 자와 더 많은 자가 있는 것이다. 구조론은 대칭을 쓴다. 대칭에 대칭을 더하면 축이 생긴다. 바퀴는 대칭을 이룬다. 바퀴를 굴리면 저절로 축이 생긴다.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충돌이 도량형의 혼란 때문이다. 저마다 판단기준이 다르다. 주관으로 보는 사람과 객관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원인측을 보는 사람과 결과측을 보는 사람이 있다. 전체를 보는 사람과 부분을 보는 사람이 있다. 절대성으로 보는 사람과 상대성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왜 판단기준을 통일하지 않고 어지럽게 다투고 있나?
대개 자기가 기준이다. 나보다 크면 크다고 하고 나보다 작으면 작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기소개가 된다. 객관적 기준을 세워야 한다. 수학은 1이 기준이다. 1은 눈금 하나를 가진 자다. 2는 1의 두 배, 3은 1의 세 배다. 수학은 기준이 객체에 있으므로 객관적이다. 관측자가 1로 고정되므로 절대적이다. 수학의 자는 사물을 잰다. 그렇다면 사건은 무엇으로 재는가?
존재는 사건이다. 사건은 변화를 반영한다. 변화는 닫힌계 안에서 일어난다. 수학은 죽은 사물을 잴 수 있을 뿐 살아있는 사건을 잴 수 없다. 변화가 닫힌계 내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물은 외부를 측정하고 사건은 내부를 측정한다. 살아서 움직이는 사건의 내부로 진입할 수 없으므로 수학은 사건을 측정할 수 없다. 사슴을 재려면 죽여야 한다. 들판에서 달리고 있는 사슴의 내부사정을 잴 수 없다.
구조론은 대칭이 기준이다. 대칭은 객체 내부에 있으므로 절대적이다. 안과 밖의 대칭을 적용하여 객체 내부로 진입할 수 있고 내부에서 다시 머리와 꼬리의 대칭을 찾는다. 대칭은 나란히 가는 것이다. 변화 중에서 나란한 것이 구조론의 판단기준이다. 변화를 나란히 쫓아가므로 살아서 움직이는 존재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다. 우리는 두 가지 관측법을 알고 있다. 하나는 관측자가 잣대가 되는 주관적, 상대적 관측법이고, 둘은 1을 기준으로 삼는 수학의 객관적, 절대적 관측법이다. 관측자의 주관에 따라 상대성이 개입하는 자기소개 습관을 버리고, 수학의 객관적 관측법을 써야 한다. 문제는 수학이 사물의 외양을 잴 뿐 사건 내부를 잴 수 없다는 점이다. 의사결정은 닫힌계 내부에서 밸런스 이동이다. 수학은 이미 끝난 사건의 죽은 결과를 잴 뿐이다.
수학은 사물을 재고, 죽은 것을 재고, 밖에서 재고, 결과를 재고, 부분을 잰다. 구조론은 사건을 재고, 산 것을 재고, 안에서 재고, 원인을 재고, 전체를 잰다. 수학은 1을 잣대로 삼고 구조론은 대칭을 잣대로 삼는다. 수학은 불변을 재고 구조론은 변화를 잰다. 구조론을 근본으로 삼고 수학이 구조론을 보조해야 바르다. 달리는 사슴을 재려면 사슴과 나란히 달려야 한다. 대칭으로 변화를 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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