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 소집, 사회
동원, 소집, 사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런데 사회의 존재는 불분명하다. 사회학은 동물적 본능과 집단적 무의식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 막연히 사회가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소설 쓰는 것이다. 사회는 존재하는게 아니라 권력에 의해 집단적 의사결정에 동원되는 것이다. 그냥 모여있는 것은 군집이지 사회가 아니다. 자원들이 직간접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려면 권력이 있어야 한다. 권력을 만드는 절차가 동원이다.
가족은 선천적으로 동원된다. 가장의 권력은 원시사회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부족민은 12살이 되면 아이를 버린다. 일본인과 유태인은 13살이 되면 아이를 내보내는 관습이 있었다. 게르만족도 15살이 되면 자녀를 독립시킨다. 신라의 화랑도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부족민이 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해도 국가는 있다. 동원구조가 존재하면 국가다. 전쟁에 동원되면 국가다. 광장에 동원되면 사회다. 노동에 동원되면 회사다. 생식에 동원되면 가족이다. 취미로 동원되면 동아리다.
동원은 권력을 만들고 소집은 권력을 행사한다. 사회는 동원되어 있다고 간주한다. 오일장은 오일마다 소집된다. 새벽장은 새벽에 만짝 하고 파장한다. 시장이 상설화 되듯이 동원이 상설화 되면 사회가 된다. 원래는 전쟁이 일어날때 사람을 동원하는데 전쟁이 반복되면 군대가 상비군이 된다. 유목민은 여름에 목축에 종사하다가 겨울만 되면 전쟁에 동원된다. 징기스칸 때는 일년 내내 전쟁을 하게 되는게 상비군이 된 것이다.
의리
의리는 집단이 동원에 앞서 권력을 생성하는 근거다. 사회의 근거는 권력, 권력의 근거는 동원, 동원의 근거는 의리다. 의리는 공적 자산의 공유다. 집단이 위협을 받을 때 대응하려면 집단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해야 한다. 권력이 있어야 한다. 권력은 개인으로부터 위임된 것이다. 권력을 집단에 위임하는 절차가 동원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담할 것인가?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내가 앞장설 것인가? 외국인이라면 언어를 몰라서 가담할 수 없다. 무언가 공유하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집단의 공적 자산을 공유하는 방법으로 벌어진 사건에 가담할 수 있는 상태가 의리다.
로크, 홉즈, 룻소 등의 사회계약설은 개소리고 인간은 계약한 적이 없다. 오랑우탄과 침팬치와 보노보와 고릴라와 긴팔원숭이는 의리가 없으므로 아직 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공유하는 것이 없으면 의리가 없다. 의리가 있는 집단이 나무에서 살살 내려와서 온갖 위험이 가득한 들판을 뛰어다니면서도 의사결정을 잘해서 살아남았다. 미친 사람이 지하철에 불을 지르면 누가 그것을 막아야 한다. 그런데 양반이라는 이유로 혹은 귀족이라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방관하면 죽는다. 그 불을 끌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낸 집단이 살아남았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은 의리가 부족했다. 그들은 집단의 위기에 맞서지 못했다. 권력을 생성하지 못했다. 대집단으로 도약하지 못했다.
의리 - 집단이 자산을 공유한다.
동원 - 집단적인 사건에 인원을 부른다.
권력 - 집단의 의사결정이 가능한 상태다.
소집 - 집단이 결정하여 인원을 부른다.
사회 - 상시로 인원이 동원되어 있다.
집단이 외부의 힘에 맞서 의사결정이 가능한 구조가 권력이다. 의사결정은 밸런스를 따른다. 약자를 차별하고 다양성을 부정하면 밸런스가 깨져서 집단적 의사결정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유 평등, 평화, 정의, 행복과 같은 말이 나온다. 그래야 인원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불을 끈다는 말이다. 관념은 공허하고 의리가 진짜다. 공유하는 자산이 있어야 불을 끈다. 지혜가 필요할 때는 똑똑한 사람을 중심으로 뭉치고, 완력이 필요할 때는 건장한 사람을 중심으로 뭉치고, 매력이 필요할 때는 센스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 그 지혜와 완력과 매력을 집단이 공유하는게 의리다. 그래야 권력을 인정하고 집단의 의사결정에 호응한다. 의리있는 집단이 의사결정을 잘 해서 살아남는다.
인간은 집단에 동원된 존재다. 동원의 근거는 의리다. 부부의 의리, 부모와 자식의 의리, 동료의 의리, 국가의 의리가 있으므로 이웃의 부름에 호응한다. 호르몬과 무의식으로 엮어진 부모와 자식의 친함은 선천적 의리다. 같은 목표를 두고 팀을 이루어 게임에 참여하는 것은 동료를 묶어주는 후천적 의리다. 선천적인 의리는 타고나는 것이고 후천적인 의리는 연습해야 한다. 동료와는 패스를 연습해서 손발을 맞춰놔야 한다. 단독 드리블의 개인기는 독점되고 패스플레이는 공유된다. 한솥밥을 먹고 한침대에서 자야 의리가 작동한다. 말로 해서는 안 되고 호르몬이 바뀌고 무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의리는 물리적으로 빠뜨려져야 한다. 전쟁이나 천재지변과 같은 재난을 맞아 공동운명체에 빠뜨려지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합리적인 결정을 한다. 내가 타인을 위해 희생하면 타인도 나를 위해 희생한다. 내가 희생해서 그 보상을 다른 사람이 받아도 상관없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다른 사람이 희생한 결과가 확률에 의해 돌고 돌다가 우연히 내게 할당된 보상이기 때문이다. 의리의 반대는 차별이다. 차별은 서로 공유하는 자산이 없다. 서로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랑우탄과 보노보와 침팬지는 아직도 그러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한다. 의리가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선 악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선이라고 한다. 악은 없고 상대적인 선의 실패를 악으로 규정한다. 악은 선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개념이다. 빛은 입자가 있고 어둠은 입자가 없다. 선은 사회라는 수렴하는 대상이 있고 악은 그 대상이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사회적 행위를 한다. 맹자의 성선설이 맞다. 인간이 악한 존재이며 교육되어야 한다는 순자의 말도 맞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대전제 안에서 문명의 진보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한 부족민의 야만성을 지적하는 말이다. 인간은 원래 선하지만 그 사회의 단위는 20명 이하의 씨족이나 100명 이하의 부족이었다. 호르몬과 무의식으로 연결된 씨족 바깥으로 나가면 인간은 낯선 타인들 앞에서 당황해 하며 악한 성질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은 본성이 악한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가 갑자기 커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악한 것이다. 호르몬과 무의식이 낯선 사람을 적대하도록 충동질하는 것이 악이다. 인간은 원래 스무명 남짓의 소집단이 동굴에서 생활하며 수렵과 채집을 하는데 맞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서 너무 큰 세계로 와버렸다. 적응하는데 애를 먹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특별히 훈련되고 교육되어야 한다.
진보 보수
생물에 진화는 있고 퇴화는 없으며 문명에 진보는 있고 보수는 없다. 일시적 퇴화는 있고 일시적 보수는 있다. 진보는 절대적으로 있고 보수는 상대적으로 있다. 사회는 선이 있을 뿐이고 악은 선이 기대에 못미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보하는 과정에 선두와 후미간의 간격이 멀어져서 간격을 조정하는 것이 보수다. 진보는 언제나 옳고 보수는 때때로 옳다. 진보의 전략 안에서 보수의 전술이 유의미하다. 진보는 인간과 인간의 간격이 밀착하여 더 많은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스무명 남짓 적은 숫자가 씨족단위로 생활하는데 맞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다. 고도의 산업사회와 맞지 않으므로 특별히 훈련되어야 한다. 더 많은 상호작용으로 사회가 자원을 최대한 동원하는 것이 진보다. 왕 한 사람만 의사결정에 참여하거나, 왕과 귀족만 참여하거나, 부르주아 계급만 참여한다면 국가이 동원력이 낮은 것이며 그 사회는 진보하지 못한 것이다. 전체주의는 억지로 동원하지만 그것은 흉내를 내는 것이며 실제로는 동원되지 않는다. 개인이 집단에 강제로 끌려와서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자원을 최대한 의사결정에 동원하는 진보한 제도이다.
주체성 타자성
동원하는 쪽이 주체라면 동원에서 배제하는 쪽이 타자다. 주체냐 타자냐는 사건에 따라 다르다. 밥을 먹을 때는 식구들이 동원된다. 식구가 주체다. 함께 밥을 먹지 않는 외부인은 타자다. 놀이를 할 때는 아이들이 동원되지만 밥을 먹을 때가 되면 각자 제 집으로 돌려보낸다. 유년기와 소년기에는 언제나 동원되고 소집되는 수동적인 역할만 맡게 되고 본인이 주체가 되어 능동적으로 인원을 동원해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누구를 왕따를 시키고 이지메를 하며 동원을 학습하려고 한다. 누군가를 적대해야 자기편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무명 남짓 소규모 씨족단위에 맞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므로 의식적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문명인이 될 수 없다. 소인배는 자신을 타인에 의해 동원되기만 하는 약자로 규정하므로 주체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스스로 소집권을 발동하지 않는다. 어른이 되려면 인류단위, 천하단위, 역사단위로 동원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능동적으로 게임을 설계하고 타인을 초대하여 인원을 동원하는 것이 주체성이다. 타인을 일단 적으로 간주하고 집단의 동원에는 응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소집에 반대하는 방법으로만 목소리를 내는 것이 타자성이다. 주체성이 지나치면 참견쟁이가 되고 타자성이 지나치면 안티가 된다. 서구는 타자성이 지나쳐서 망하고 동양은 주체성이 지나쳐서 망한다. 기본적으로 타인은 남이라고 선을 긋고 의리를 쌓아서 의식적으로 동원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낯선 사람을 동료로 간주하고 참견하는 행동은 주책이다. 인간은 집단과 결속되어야 안심되는 존재다. 타자성이 부족하면 속고, 휘둘리고, 낚이고, 당한다. 주체성이 부족하면 고립된다.
자아, 소외, 자유의지
자아는 나의 주체적인 의사결정권이다. 권력은 동원에 의해 성립한다. 동원의 주체가 자아다. 나의 몸과 마음도 때로는 내것이 아니다. 동원하여 내것으로 만들어야 알콜중독, 도박중독, 게임중독에 빠지지 않는다. 각종 중독은 나의 몸이 동원을 거부하고 나의 권력을 배반하는 것이다. 아기는 자아가 미성숙하므로 의사결정을 엄마한테 위임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남탓을 일삼고 벌여놓은 일에 책임지기를 거부하며 유아적인 퇴행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아가 발달하지 못한 것이다. 권력보다 현찰을 원하는 사람은 자아가 희미한 사람이다. 자아는 심리적 동원에 의해 확대된다. 나의 영역, 세력, 서열이 나에 속한다. 자아는 어느 단위에서 게임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더 큰 단위의 게임에 참여해야 한다. 개인단위, 가족단위, 동료단위, 부족단위, 국가단위를 넘어 인류단위의 게임에 동원되어야 한다. 천하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은 자아가 천하단위로 확대된 것이다. 반대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이겨먹으려고 하거나 동료를 경쟁상대로 여기는 사람은 자아가 축소된 것이다. 큰 게임 안에서 작은 게임이 기능한다. 그것이 소속이다. 반대로 금 밖으로 밀려나고 배척되고 소외될 수 있다.
자아는 세상을 향하여 능동적으로 게임을 거는 것이며, 소외는 게임에 참여하지 못하고 금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고, 자유의지는 게임의 참가여부를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게임의 주최측이 되어 적극적으로 자신의 게임을 개설하고 타인을 초대하는 것이 자유의지다. 자유의지가 없으면 인간이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는 당연히 있다. 결정론은 모든 것을 사전에 정하는 것인데 이 방법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세상은 확률에 의해 작동하고, 확률은 게임에 의해 작동하고, 게임은 상호작용의 랠리가 권력을 얻어 대칭을 지배한다. 랠리 1로 대칭 2를 결정하므로 비용이 절약된다. 확률은 자원을 대칭적으로 조직하여 비용을 줄인다. 사회를 전방위로 50대 50으로 균형있게 만들면 의사결정에 드는 비용이 절약된다. 남자든 여자든 한쪽이 강해서 밸런스가 깨지면 자원이 동원되지 않아 비용이 많이 든다. 남자만 참여하거나 여자만 참여하면 손발이 맞지 않아 의사결정에 실패한다. 그 집단은 망한다. 살아남은 집단은 보다 효율적인 집단이며 효율적인 집단은 대칭적인 집단이며 대칭은 힘과 속도의 바꿔치기다. 당장의 이득과 나중의 권력을 교환한다. 게임의 참여자는 자체동력이 있고 자체엔진이 있고 자기계획이 있고 자기가 설계한 게임의 주최측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자유의지다. 외부의 눈치를 보고 타인의 평판공격에 신경쓰며 집단의 무의식에 휘둘리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게임에 복무하는 것이다.
영역 세력 서열
인간의 행위는 다분히 동물적 본능에 지배된다.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은 영역, 세력, 서열로 권력을 창출한다. 무리가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숫자를 불려서 더 큰 세력을 이루고, 무리 안에서 더 높은 서열을 차지할 때 동물은 권력을 차지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때 동물의 마음은 편안해진다. 영역, 세력, 서열이 집단의 공유자산이다. 자신이 서열이 낮은 것은 참지만 서열이 전혀 없는 무질서한 상태는 참지 못하는게 인간이다. 서열이 고착된 사회는 비효율로 망한다. 서열은 신분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고 사건에 따라 정해진다. 사건이 지혜를 필요로 하는지, 완력을 필요로 하는지, 매력을 필요로 하는지에 따라 서열이 순식간에 새로 정해져야 좋은 동원체제를 가진 좋은 사회다.
동물은 서열싸움이나 짝짓기를 통해 서열을 높인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집단의 서열구조 안에서 호흡하기를 원한다. 진보가 새로운 권력을 창출할 의도로 기성권력의 서열구조를 깨뜨리므로 노인들이 불안해진다. 권력은 환경에 대한 통제권이며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지 못해도 권력구조가 작동하고 있어야 인간은 안심한다. 보수들이 걸핏하면 간첩소동, 빨갱이 소동을 벌이는 이유는 권력의 현장을 목격해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소는 장벽 안에서 편안하고 인간은 권력구조 안에서 편안하다.
인간은 환경에 반응하는 존재이며 단지 반응을 원한다. 환경과의 긴밀한 상호작용을 원한다. 영역은 자연환경, 세력은 사회환경, 서열은 내부환경이다. 악기가 소리를 내지 못하면 망한 것이다. 환경이 반응하지 않으면 망한 것이다. 긴밀한 상호작용 안에서 인간은 편안해진다. 자유 평등 정의 따위 관념적 접근이나 동기 야망 욕망 목적 따위 심리학적 접근은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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